오늘 설교

[주일 설교] "사사(3) 바락? 발악!" (삿 4:6~10)

소리유리 2024. 8. 3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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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마다 사사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사사 드보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언급한 대로 드보라와 함께 등장하는 바락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드보라, 야엘이라는 여인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여인이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당시 사회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두 여인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여기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철병거와 강력한 적들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지만 여인을 통해서도 대승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성을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농구시합을 하는데 상대방은 프로농구 선수에 평균키가 2m가 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150cm도 안 되는 초등학생이 나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잠시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키 큰 프로 농구선수들이 우리에게 시합을 요청한다면 나서야 할까요?

이기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우리 중에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 사람이 나서야 합니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사람이 선수로 선발되면 안 됩니다. 


드보라, 야엘이 키 작고 어린 선수입니다. 
드보라, 야엘이 아니라면 본래 누가 나서야 하는가? 

'전쟁, 싸움'은 남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면 본래 나서야 하는 그 남자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요? 
그 당시 남자들은 꼼짝 못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5장 7절에 드보라가 일어났고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일어서야 할 남자들은 움츠려 들고 그 남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락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사사기 4장 6~10절입니다.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바락!  

드보라는 사람을 바락에게 보내어 명령합니다. 

6, 7절입니다.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드보라는 바락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강력한 적들을 손에 넘겨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이것은 권고가 아닌 명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락이 두려워하는 군대장관 시스라, 철병거와 군대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어 바락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에 대한 바락의 반응이 8절입니다.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하나님의 명령과 승리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감히 철병거 900승의 장군 시스라와의 전투를 하고 싶지 않은 바락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앞서 나가 싸워야 할 남성의 대표격인 바락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앞장서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바락의 답변을 들은 드보라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9절입니다.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결국 이 전투에 주도권은 바락이 아니라 드보라가 쥐게 됩니다.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시스라를 바락이 아닌 여인의 손인 야엘의 손에 하나님께서 맡기십니다. 

발락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철병거 900승이 어떻게 쓸모없게 되었는지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기 5장 20~21절을 살펴보면 ‘비와 번개’를 무기로 사용하십니다. 
비와 번개를 사용하여 적군을 무찌르십니다. 

 

재밌는 것은 바락의 이름 뜻이 '번개'입니다.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바락!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선 번개와 비를 사용하여 적군을 무찌르십니다. 

 

이렇게 표현해 볼까요?
바락,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발악'하면서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시스라와 철병거 그리고 강력한 군대가 더 커 보입니다.   

이 부분에서 김지찬 교수님은 아주 멋진 한 마디의 말을 이야기합니다. 
‘사육된 상상력’  
주저하는 바락, 하나님의 말씀에 발악하면서 듣지 아니하는 그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적군의 밑에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상상력조차 사육'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은 어려운 말이죠. 

실제로 바락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여사사 드보라가 등장했지만 군대가 강해진 것도 아니고 철병거를 능가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환경이 변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가서 싸우라!
신앙이 좋을 때 또는 그래도 믿을만한 뭔가가 있을 때는 괜찮지만 20년이나 이방인의 압박을 받고 살아온 바락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울한 현실에 갇혀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현실이라는 울타리에 꼼짝 못 하고 갇혀서 상상력조차 사육되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손에 파실 것이라는 말을 들어도 상상하지 못합니다. 

지금 바락에게 있어서 도저히 시스라가 맨발로 도망가는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발악'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습 어떻습니까? 
우리의 상상력은 어떻습니까?

아니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면 현실의 벽을 쳐다보며 신앙과 생활을 별개로 여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상상력을 가져야 합니다. 
철병거 900승이 있더라도 이기게 하신다면 대승을 거두는 장면을 상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성스러운 전쟁 즉 성전입니다. 


시스라와 이스라엘의 전투에서 가장 힘들게 수고한 사람은 사실 바락입니다. 

드보라가 같이 가주긴 하지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전쟁을 치르는 바락입니다.

게다가 군대장관 시스라를 쫓아 열심히 달려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미 말씀하신 대로 시스라의 머리는 한 여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어떻습니까?
바락의 결심과 행동은 어느 면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그의 사육된 상상력!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그에게 나가서 싸우라는 말은 그냥 가서 죽으라는 것과 동일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발악을 합니다. 

가지 않겠다고 가야만 한다면 당신과 꼭 같이 가겠다고 말입니다. 

그에게 사육된 상상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비전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었다면...

아니 최소한 시스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멸망할 것을 바라볼 눈을 가졌다면 그는 시스라를 취할 사람, 영광을 얻을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

우리의 상상력!

다른 말로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현실적으로 황당한 미래라 할지라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실상을 보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 가지 환경으로 인해 사육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여전히 사육된 상상력 안에서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판단에 따라 따라가기도 하고 발악하기도 하지는 않습니까?
바락은 결국 발악하다가 영광을 한 여인의 손에 빼앗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의 손을 통해서만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바락에서 야엘에게 영광을 넘기시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역에 동참한다는 것 그 자체로 감사해야만 합니다. 
승리가 보장된 싸움에 끼어준다는 것 그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존재입니다. 
청지기로 발악하지 말고 끼어준다고 할 때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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