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월의 마지막 수요일입니다.
수요일마다 사도신경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에 사도신경 즉 신앙고백 이야기, 두 번째 주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세 번째 주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네 번째 주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 살펴볼 사도신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같이 살펴볼 본문은 요한복음 19장 17~20절입니다.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오늘 설교를 이어가기 위해 우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더운 여름에 심각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가장 말하기 싫은 부분이며 말하더라도 그냥 쉽게 넘어가려는 부분입니다.
바로 ‘죄’입니다.
이 죄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냥 쉽게 넘어가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심각해지기 때문에 굳이 교회에서도 자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은혜도 없습니다.
사랑만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 사랑이 왜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가 하는 그 원인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죄와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잠시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본격적으로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꼭 한 번씩 언급되는 사람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는 유대 총독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합니다.
특별사면도 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외웁니다.
빌라도가 들으면 '난 참 억울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어디까지나 원칙적이고 법적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것은 유대인이지만 법적 최후 선고를 한 것은 역시 빌라도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구하려고 한 것도 사실이지만 법적으로 예수님을 못 박히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명확하게 해야겠죠.
유대인들에게 사형선고권은 있지만 사형집행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집행권은 바로 빌라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슬쩍 예수님의 죄명을 내란죄로 넘기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어물쩍거리자 유대인들은 이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빌라도의 약점이죠.
자신이 다스리는 곳에서 폭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리의 위태로움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에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줍니다.
그리고 2천 년이 넘도록 그리스도인이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한 번씩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그에게 이익이었을까요?
폭동을 두려운 빌라도!
그는 결국 그 일로 인해 평생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인물이 되고 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의 이익을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히트한 광고 문구가 있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빌라도의 '순간의 선택'이 2천 년이 넘는 지금 그의 이름을 사도신경을 통해 거론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성경에서 '나그네'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그네의 우리의 인생길!
이 나그네의 인생길 때문에 영혼을 거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고난과 죽으심.
고난주간, 부활절이 되면 자주 상영되는 영상이 '패션오프크라이스트'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납과 뼛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인해 살점이 떨어져 가고 18cm의 대못에 손과 발이 못 박히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면서 예수님을 동정합니다.
참 불쌍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사랑 참 감사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뭔가 부족합니다. 이상합니다.
아니 아주 많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혹은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죄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일어났습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참혹한 죄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녀를 죽이고 성폭행과 강간, 서로 속이고 속고..
말로 하기조차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죄들...
세상의 그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신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를 너무나 많이 사랑하시고 늘 동행하시고 웃어주시는 친구이신 예수님을 더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한 희생, 심각하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 개념을 자꾸 뒤로 밀어버립니다.
피, 죄, 속죄의 개념이 인간을 불쾌하게 그리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라는 것에 대해서 싫어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범죄자들이 발생해도 그들의 심리분석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는 그가 어렸을 때에 학대를 받았고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학교 다닐 때에 여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등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그 흉악한 범죄자는 죄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합리화해 줍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죄와 연관시켜 말하기보다는 죄를 없애고 사랑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 고통, 죽으심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야기할 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으심을 당해야만 했던 그 결정적인 이유! 바로 죄입니다.
그것도 추악한 나의 죄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입니다.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사함을 받으려면 피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함을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사함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고 바로 죄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시고 심판을 내리시고 그 원인이 되는 죄를 없애려면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을 보겠습니다.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이것은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말씀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리고 범죄 하는 영혼, 그 영혼이 바로 나입니다.
내가 죄를 범한 죄인입니다.
죄는 모호한 개념이 아니며 불순종 행위들, 죄를 하나님은 쉽게 눈감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철저하신가!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할 만큼 죄를 그냥 넘기시지 않습니다.
유월절 사건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10번째 재앙인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재앙을 겪을 때에 살아남았다고 그저 좋았을까요?
사방에서 울고 불고 난리였을 것입니다.
온 동네가 비린내로 가득했습니다.
공포의 밤입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들은 감사하며 구원의 날이라고 하지만 그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죄의 무서움을 먼저 알아야 그 사함,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사함이 없으면, 은혜가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건!
맞습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가?'
'내가 죄를 지으면 절대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지만 그 사랑이 바로 나의 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죄의 무서움을 먼저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암송하는 사도신경!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를 암송할 때 불쌍한 예수님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죄의 무서움을 알아야 구원의 은혜와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 결단,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이것을 꼭 기억하며 묵상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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