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사도신경(6) - 다시 살아나시며" (요 20:19~23)

소리유리 2024. 9. 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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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첫 주 수요일입니다. 
수요일마다 사도신경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에 사도신경 즉 신앙고백 이야기, 두 번째 주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세 번째 주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네 번째 주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지난주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살펴볼 사도신경입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성경본문은 요한복음 20장 19~23절입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부활에 대한 감동, 감사가 없다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에 교회마다 많은 준비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활절 칸타타죠.

부활하심에 대해 찬양하고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부활하셨다!'

부활하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사하고 계란도 나누지만 정작 부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그리 중요한 사건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실상 그렇게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가 아닙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이야기합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예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듣고, 눈으로 보고, 또 자세히 보고, 직접 손으로 만졌다고 말입니다.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내가 직접 손으로 만져봤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거리고 그들의 목숨거리였습니다. 

즉 목숨을 걸 정도로 대단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활이라는 사건이 굳이 우리가 이야기를 안 하고 그냥 넘어가고 되는, 믿기는 하는데 굳이 확인은 안 해도 되는 이야기로 전락했습니다. 

우리는 사상, 철학 같은 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실제로 대학마다 철학과는 사라지고 있고 기초 과학보다는 실제로 취업하기 위한 학과들이 더 인기입니다. 
하지만 알 건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철학과 사상을 가지고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드라마 및 각종 미디어 혹은 스마트폰의 어플을 만들 때도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도 영향을 받습니다. 

현대 철학과 사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중에 불트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은 아주 유명하지만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를 ‘사실 역사’와 ‘의미 역사’로 나눕니다. 

말이 좀 어렵죠? 
'사실 역사'는 실제 역사 사건을 뜻하며 '의미 역사'는 구속사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며 '사실 역사'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실제 일어난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의미 역사'는 역사적으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않았는지 관계없이 그 주장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중요시합니다.
즉 부활에 적용한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주장이 초대 기독교인의 경험에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실제로 일어났는가가, 그것이 사실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 생각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불트만은 이야기합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건 즉 '사실 역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생각이나 경험이 중요하다. 

즉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서 부활하셨는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이 '사실 역사'를 전하는지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 이 순간이 지금 내 경험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말이 어렵죠. 

여러분들 예수님을 만나셨나요? 예수님을 체험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굳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음에 집중하십시오. 

어떻게 들으면 아주 멋집니다.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절대적인 잘못입니다. 

사실 이 시대에 이적, 기적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교회에서도 굳이 동정녀 탄생, 부활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나눕시다. 서로 칭찬합시다 하는 메시지에 더 집중합니다. 


그래서 모순되지만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즉 실제로 역사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지 않습니다. 

성공회 신학자 스퐁 주교라는 사람은 정면으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부정하고 비판합니다. 

그러한 세계관은 없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부활을 신화로 이야기합니다. 

천사, 사탄 등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흥미롭게 이야기하고 신화처럼 이야기할 대상이지 굳이 그것이 현실에서 나타나고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에 대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희대의 사기극 아니 몇 천년에 걸친 사기극이 되겠죠. 

그리고 수많은 목사님들은 다들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 진리는 살아있습니다. 

 

재미있는 예화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버드 법과 대학을 설립한 법학자 사이먼 그린리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부정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법률가로서, 법률적 심리에 따라 연구하면서 '성경 저자들이 공모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허위로 조작했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들이 본질상 서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린리프는 연구가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연구가 거듭될수록 부활을 반박할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연구가 오히려 역행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이 유명한 법학 교수는 자신의 의도와 상반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영화 벤허를 아십니까? 
이 영화의 원작자는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터키 대사를 지낸 바 있는 루 월레스(Lew Wallace)입니다. 

유명한 장군이면서 동시에 문학의 천재인 월레스는 그의 친구인 무신론자 로버트 잉거 솔(Robert Ingersoll)과 기독교의 신화를 영원히 없애버릴 책을 써서 인류를 그리스도에게 매어있는 굴레로부터 벗겨주자고 다짐했습니다. 

 

월레스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깊이 연구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허위라는 것을 주장하는 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책의 제1장을 마치고 제2장의 첫 페이지를 쓰다가 그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확실성에 더 이상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건이 있은 지 2주 후에 그는 소설 <벤허>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부제는 ‘그리스도의 이야기(A tale of the Christ)'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1880년 출판과 동시에 200만 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연극, 영화화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월레스의 지금까지 쓰인 예수의 생애를 다룬 저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소설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을 신화에 넣어버리려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하나 찾아볼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합리주의, 경험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등 지금 이 시대를 이끌고 있는 철학, 사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에 점점 익숙해집니다. 

마치 예수님은 인정하고 예수님의 멋진 이야기는 인정하지만 부활은 굳이 믿지 말자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은 부활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모형입니다.

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성소에 들어가서 나올 때에 죄가 사해졌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물이시면서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은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부활 사건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이기심과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해졌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사를 온전히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그냥 믿으니까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부활을 부정하며 여러 가지 철학과 사상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알지 못하면 어느새 코 베어갑니다. 
굳이 죄와 부활, 이적과 기적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 즉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는 가르침을 이야기하자는 말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부활하심을 고백한다면 부활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방어하고, 그들을 공격할 만큼 확실하게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방어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활교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당당하게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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