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사도신경(1) - 신앙고백" (신 26:5~9)

소리유리 2024. 7. 3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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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수요일마다 사도신경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닌 성도는 모두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입니다.

 

외울 정도로 익숙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오늘부터 살펴보는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가 암송할 때마다 그 의미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사도신경 자체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많은 성도들이 암송하기 시작합니다. 

사도신경은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의 의미를 찾으면 '사도, 베드로, 로마 교회' 등의 단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 이야기들 중에 반드시 들어가는 말은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신명기 26장 5~9절입니다.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지금 읽은 구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1절부터 4절을 또 보겠습니다.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추수하고 그 첫 소산물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는 고백입니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고백합니다. 
첫 고백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수확을 가져다 하나님께 드리며 고백하는 이 고백은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는 것보다 더 벅찬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고백을 그냥 줄줄 외우는 것이 아닌 진심의 신앙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직접 체험하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이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떠한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신앙고백입니다. 

나의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과 비교할 때 어떤가요? 

 

사도신경을 외우기 시작하면 경쟁하듯이 줄줄 외웁니다. 

너무나 긴 시간 외워온 분들도 많습니다.

사도신경이 시작되면 자동적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하면 사도신경을 하면서 다른 생각도 합니다. 

금방 외운 그 구절이 무슨 말이었는지 모릅니다. 

외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끝났습니다.  


조금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고백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들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차 그 감동이 식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그들의 고백은 벅찬 감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사도신경을 좔좔 외우면서 벅찬 감동에 빠지나요? 

물론 우리도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나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 감동이 덜하겠지만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그 내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수학을 배울 때에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것을 줄줄 외웠습니다.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외웠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줄줄 외우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써먹어야죠!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신경!

줄줄 외워서만은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암송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고 내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사도신경에는 우리가 고백하고 믿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 다 담겨있습니다. 
현대 교회들이 교리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고, 가르쳐주지도 않아 문제가 많습니다.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나 살펴볼까요?

13세기초 칭기즈칸이 집권하면서 원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은 통치 말년에 기독교와 접촉이 활발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독교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손자대인 3대째 왕인 구육왕에 이르러 왕의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왕 자신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구육왕은 기독교 원리를 제국정부에 도입하려고 시도했고 수많은 신학교와 교회가 제국 전역에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몽고 제국이 망하면서 기독교가 전래되었나 할 정도로 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환경 때문에 회교로 개종하고 핍박 등을 통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원인을 여러 외적인 요소와 함께 내적인 요소에서 찾습니다.

몽고제국의 기독교는 교리에 대해서 너무나 미온적이고 무감각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몽고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동방기독교인 경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경교는 '네스토리우스'라는 사람에게서 시작된 한 분파였습니다.

그는 교리에 대해서 타협적이었습니다. 

 

몽고에 들어오면서 불교와 타협했고 이신칭의는 강조했지만 불교와 양립할 수 없는 속죄교리나 예수님이 우리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은 삭제해 버렸습니다. 

불교는 살생을 금기하는데 죽음을 핵심으로 하는 구원교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고제국의 기독교는 변질되어 갔습니다. 
평안할 때는 모르지만 고난과 환란이 닥쳐올 때 교리적인 근거가 없는 몽고제국의 기독교는 너무나 쉽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리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모아둔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신경을 더 공부하고 나의 신앙고백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가 더욱 사도신경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현시대는 교회가 스스로 문화에 종속되는 시대라고 합니다. 

교회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고자 신앙고백을 변경하고 있다고 마이클 호튼이라는 사람은 비판합니다. 
신앙을 고백하기보다 신앙을 조정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님이 뉴스위크지에 이런 말을 실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칭의나 성화, 혹은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그 목사님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싫증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손쉬운 종교 접근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웃고 즐기고 재밌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죄,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사랑과 자존감, 좋은 말들로만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사도신경은 죄와 죽음, 부활, 십자가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대한 고백이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도신경은 우리나 혹은 초대 교부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마치 꿀벌들이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부터 꿀을 모아내듯이 위대한 선지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의 가르침을 오묘하게 요약한 것이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인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온전히 교리에 있어서도 바로 서야 합니다. 
사도신경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니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대해서 손봉호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세례를 줄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이 필요하기 때문.
둘째 자녀들에게 교육시킬 때에도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셋째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서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즉 기독교를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서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 있어서 우리가 당한 심각한 위기는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 위기가 아니라 신학적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복음 아닌 복음이 넘치는 우리의 환경 속에서 사도신경의 내용을 명확하게 알고 전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 때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의 내용을 알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교리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만 합니다. 

무작정 믿는 것은 안됩니다. 

반지성주의는 위험합니다. 

미국에서는 '찰스 피니'라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 이후부터 사실상 교육받지 않은 사실을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냥 '주여'를 외치고 결심과 결단을 요구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반지성주의와 함께 지성주의도 위험합니다. 

양 극단은 다 위험하죠. 

우리의 신앙이 더욱 든든하게 서기 위해서는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만 하고, 그 신앙고백의 중심에 있는 사도신경에 대해서 우리는 더욱 귀하게 여기고 공부해야만 할 것입니다. 

 

수요일마다 사도신경에 대해 함께 알아보고 공부하고 적용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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