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사도신경(2)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창 1:1)

소리유리 2024. 8. 7.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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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 사도신경을 설교합니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은 사도신경 즉 신앙고백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사도신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문장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크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큰 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성령을 믿사오며'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본문은 창세기 1장 1절 말씀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구절입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암송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들은 '아멘' 하고 고백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근거를 이성적,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 믿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믿어지지 않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증명하듯이 믿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언젠가 이야기하도록 하고 오늘은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고백했다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해하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믿는 그 대상이 어떠한지는 알고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믿는 대상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대상도 모르고 무작정 믿으면 뭐 어때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 믿는 대상이 나무, 돌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소한 내가 믿는 대상이 무엇인지?

어떠한 분인지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습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말로 아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알다'라는 단어 중에 '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야다'는 체험,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아주 깊이 있는 앎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정말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사탄의 최고의 전략은 자신의 이단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을 순화된 종교의 우상으로 점점 변형시키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렵죠. 

쉽게 이야기하면 굳이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내세우고 그것을 믿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을 변질시키고 하나님을 하나님 같지 않은 분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극단적으로 서로 믿는 하나님이 너무나 다르게 이야기됩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서로 이야기해 보면 그 하나님이 서로 너무나 다르게 나옵니다. 
당신의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죠. 

역사적으로도 하나님을 이상한 방향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엄하고 가혹하게 우리를 대하시는 분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혹은 요즘에는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인식하게 합니다.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은 결코 야단치지 않고 징계하지 않고, 절망보다는 무조건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만듭니다. 

사랑과 자유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유행처럼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징계보다는 나를 늘 바라보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가 아닌 청중들, 대중들의 취향에 맞는 즉 '현장의 요구에 따라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하나님'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신학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한 학문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이 마치 신학생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신학이 평신도에게 찬밥 신세를 당합니다. 

신학, 교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고 치유와 예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극심한 체험, 경험이 더 이야기됩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는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절대적인 신이 있고 내가 의지할 대상이 있고, 소원을 빌 대상이 있는 데 그분이 그냥 하나님이다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호튼이라는 신학자는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나 편하게 그리고 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는 하나님을 심판대에 올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쓰나미 같은 대재앙을 내릴 수 있어? 베트남 전쟁은? 

수많은 자연재해 그리고 신문마다 이야기되는 어린이 성폭행은? 
하나님에 대해서 따집니다. 

아니 좀 더 가혹하게 하나님을 심판대에 올리고 우리가 심판하는 추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유명한 설교가가 있습니다. 

그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로 미국에서 대각성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는 그 설교가 ‘하나님이 분노한 죄인의 손에 놓여있는’ 형편이 되었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내가 믿는 그 대상이 어떠한 분인지 아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무작정 하나님을 믿습니다만 외친다고 그분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적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다른 신도 믿고 혹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믿기 편하고 내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은 내가 만든 우상이고 그 우상을 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이 더욱 우리의 신앙고백을 엉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먼저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을 알자!'입니다. 

제대로 알자! 

그냥 시대의 흐름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자는 것이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지식을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알던 경험, 그냥 들어왔던 것들이 아니라 성경적인 지식을 넣어야 합니다. 
이성이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졌을 때 '그냥 한눈에 빠졌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지만 그냥 한눈에 빠졌어 난 그 사람하고 꼭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바보라고 할 것입니다.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지? 그 사람 가족은 어떤지? 그 사람의 직장과 비전 등은 어떤지'

다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야 합니다.

성경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그래서 신학, 교리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오늘 우리가 고백하고 알아야 하는 것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먼저 이야기되는 것이 '전능하사'입니다. 
'전능'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에나 못함이 없이 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이라고 합니다. 

전능!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구나? 내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해주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내가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닙니다. 

 

전능이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나의 위치를 명확하게 합니다. 

전능은 하나님만 소유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아주 간단하게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부분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신학적으로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쉽게 말하면 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도 유사한 것이 있는 것,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으로는 자존성, 자족성, 불변성, 편재성 그리고 전지 전능성 등을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만족하시고, 외롭거나 부족하시지 않으신 하나님!

불변성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요즘 말로 업그레이드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완전하신 분으로 편재성도 이야기합니다.

모든 곳에 계시며 전 우주에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드린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이 가능한 전지전능성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의 불완정성을 인정하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유적 속성은 거룩성, 선하심, 무한성과 인격성 등을 말합니다.

공유적 속성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사람과는 그 질적 차원이 다른 것들입니다. 

결국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고백에는 하나님과 나의 자리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천지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나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창조론, 진화론을 이야기하며 논쟁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창조론도 아닙니다. 

그냥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피조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놀라운 특권!

 

이 특권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전능하신', '창조주', '아버지'인 하나님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문장을 외울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온전히 드리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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