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 설교] "팔복(7) 화평하게 하는 자" (마 5:1~12)

소리유리 2024. 8. 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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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첫 주일입니다.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교회마다 여름 행사로 바쁜 시기입니다. 

여름 행사를 통해 신앙이 더 성숙해 가길 기대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 깊고 넓게 뿌리내렸으면 합니다. 

 

주일설교로 팔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팔복은 순서대로 복의 내용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앞의 복이 뒤의 복과 연관됩니다. 

오늘도 이전의 복들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 것은 나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의미합니다.

나의 영적 상태가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것!

결국 그러한 자들이 바로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기에 그로 인해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  
죄로 인해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함을 깨닫고 필연적으로 애통하는 자!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철저하게 애통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하늘나라의 기업입니다. 

 

네 번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한 자는 온유할 뿐만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날마다 영적전쟁을 치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다섯 번째 복은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긍휼은 측은함과 행동이 합쳐진 것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긍휼히 여기며 그들이 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에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긍휼함과 행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복은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그냥 착하고 순진한 것을 초월한 그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 목적에 있어서 다른 것들과 혼합되지 않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한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 복은 본격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입니다.  

 

그리고 오늘 일곱 번째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9절입니다.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화평을 이루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팔복 이제 일곱 번째 복에서 나 자신을 향한 삶 보다 다른 이들을 향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각처에서 보이는 영향력은 막대합니다. 

그 영향력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 또는 작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든 작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죠. 

나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굳이 영향을 끼치려고 하지 않아도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 더욱 그렇습니다. 

내 주변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그 영향력은 더 커집니다. 

나를 보며 어떤 이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신앙생활은 저렇게 하는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가 영향을 끼칠 때에 더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바로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것!

그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화평이라는 말은 말 그래도 화목하고 평화로운 것을 이야기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것은 내가 있음으로 해서 화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되는 것이죠.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서 화평하지 않은 상태인데 내가 있음으로 해서 화목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가 있습니다. 

'샬롬'입니다.

그 샬롬이 바로 '평화, 평안, 화평'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인사가 있죠.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이 말이 바로 샬롬입니다.

안녕이라는 말이 아무 탈없이 평안한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화평하게 해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는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화평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언제까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만을 가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누구와?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평입니다. 

 

그렇다면 화평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말 그대로 아까 말씀드렸듯이 평화, 평안,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이 화평하게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적당한 타협이나 혹 무마시켜서 말썽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소극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제대로 된 신앙의 모습을 갖지 못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대로 된 모습을 갖지 못한 그들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 증거는 무엇인가?

바로 화평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

여기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근본적인 이유를 해결해야 합니다.

화평의 반대가 '다툼, 싸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그 다툼과 싸움의 근본적인 이유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화평, 화목보다는 다툼, 싸움에 더 가깝습니다. 

만나면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야단치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러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런 면을 보면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는 존재 같습니다.

그러한 이유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죄에 물들여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우리에게 주는 것 중에 하나가 우월감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의 여러 원인이 있지만 오늘 저는 이 우월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을 보겠습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과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우월감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합니다.  

'나는 세리와 다릅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혼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합니다.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우월감과 열등감!

우월한 자는 열등한 자로 판단되는 사람을 공격하고 피해를 주고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자신의 의로움이 자신보다 못한 자를, 자신보다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사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우월감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배려와 사랑도 없이 마음대로 짓누르고 압박합니다. 
기분 나쁜 소리일지 모르지만 어떤 분은 일본과 독일에 대한 차이를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독일은 전쟁 후에 주변 나라에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우월감이라고 말합니다. 


독일은 주변의 나라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나라들이기에 솔직히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나 중국을 얕잡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나라에 굳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가치를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요? 

저는 지금 반일감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본이 그렇게 생각하고 안 하는 것 그러한 모습이 지금 나에게도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우월하고 월등하기 때문에 열등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이상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은 성경에서 손에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왕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자 범죄 했습니다. 

 

밧세바라는 여인을 취합니다. 

우리아를 무참하게 죽게 만듭니다. 
우리아를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은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면 다윗을 깨닫게 합니다. 

부자가 한 그 행동 우리는 지금 그 부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깨닫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통도 터지지만 실상 내가 그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합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이렇게 막 대해도 괜찮아. 

아니 저 사람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너와 달라. 

나는 너에게 피해를 줘도 되고 너는 그러한 것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야! 

지금 저는 아주 악독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제가 목사가 되어서 최대한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예전에는 좀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전 사람에 대해서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성향이 아주 강했습니다.

예전에 아주 싫은 교회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냥 싫었죠.

받은 것 없이 주는 것 없이 싫은 그런 사람이 있죠.

그냥 마음속으로만 싫어하면 되는데 그 당시 저는 사람이 덜 돼서 그냥 앞에서 싫은 것을 마구 표현했죠. 


시비 걸고 직접 싫다고 말하고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했던 제 모습이 참 부끄럽지만 그 당시 저는 그렇게 하는 제 모습에 대해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에게 그런 대우를 해도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 친구는 그렇게 대접받아도 되는 제가 싫어하는 친구였습니다. 
우월감의 극치는 노예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백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바로 나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진정으로 화평해야 합니다. 

그리고 화평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의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내가 우월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최선의 것으로 대접할 줄 아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할 때에 참된 평화가,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사랑야 하는가? 

나는 저 사람과는 다릅니다.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고 애통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냥 그 순간 끝장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의 분위기 좋은 모임에서 화평하게 하는 것은 굳이 내가 없어도 잘 이루어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전쟁 가운데, 싸움 가운데 내가 있음으로 화평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1절부터 22절 말씀을 보면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 왜 오셨다고 합니까?

스스로 낮아지셔서 왜 이 땅에 오셨나요.

열등감에 빠져있는, 죄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내려오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우리 안의 화평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화평하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대표적으로 우월감과 열등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일곱 번째 반드시, 꼭, 기필코 누려야 하는 복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제대로 살아가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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