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결혼식에 참석했다.
기쁨나무교회 자매가 결혼한다.
아직은 많이 친하지 않지만 앞으로 많이 친해질 자매다.
결혼예식 후에 교인들이 단체사진을 찍는다.
교인이 많지 않아 갑자기 나도 사진을 같이 찍었다.
결혼식 단체사진은 정말 정말 오랜만이다.
식사는 뷔페...
개인적으로 뷔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열심히 먹는다.
집에 와서 이것저것 정리한다.
지인에게 전화가 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곳과 그 사람 이야기를 한다.
기독신문에 기사가 나왔다고 한다.
지인은 제목만 보고 기사 내용은 읽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기사를 쓰고 싶을까?'라고 내게 묻는다.
어떤 내용인지 굳이 찾아보고 싶지 않다.
뻔한 거짓말과 자신을 드러내는 말들이 가득할 테니까...
40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지 자랑하는 글.
후임을 뽑는 것이 얼마나 순조롭고 은혜 가운데 되었는지,
자신과 그곳이 얼마나 이상적인 사람과 모범적인 곳인지 어이없이 말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내용이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찾아보지 않는 것은 그 글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뜻, 은혜 등등'의 단어를 보고 싶지 않아서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사람의 방법, 거짓과 부정 그리고 인위적이고 불공정한 방법으로 밀어붙이고는 그것을 하나님으로 포장하는 글을 보고 싶지 않다.
문득 지인에게 '그 사람 참 양심도 없다'는 말을 한다.
물론 지인은 200% 공감하며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고 말한다.
설교를 준비하다가도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설교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자녀와 다툼을 하고서는 가정의 화목을 설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면에서 참 뻔뻔하다.
아니 그냥 아예 삭제한 듯하다.
그리고 삭제에서 멈추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스토리텔링을 좋아해서 이야기를 마구 만들어낸다.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앞에 '하나님'을 붙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하셨다고...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
'역겹다'
'속이 메슥메슥하고 구역질이 날 만큼 거슬리는 듯하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굳이 글을 찾아보지 않는다.
바로 이 단어가 실제로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안한 모습으로 가장한 그 사람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누구를 위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곳의 사람들을 위한 것도 결코 아니다.
확실한 것은 본인이 가장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결코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글픈 마음도 든다.
그래야 했을까?
그리고 자신을 기사로 써야 했을까?
그래 맞다.
그게 그 사람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길로,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나는 하나님을 내편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야겠다.
오늘도 설교준비를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