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로 계속해서 사사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입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기 11장 29~33절입니다.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 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입다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의 출신은 좋지 않지만 똑똑하고 리더십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홍길동과 비슷합니다.
입다가 지금 이 시대에 산다면 방송국에서 그를 취재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출생의 아픔을 견디고 일어나서, 자기를 버린 민족을 구한 영웅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의 뛰어난 능력들을 열거할 것입니다.
성실함과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아주 탁월한 사람이라고 언급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입다를 '사사시대의 암울한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는 그 시대가 어떠했음을 잘 반영하는 인물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본문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입다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입다는 길르앗 거민의 머리와 장관이 되어 암몬과의 싸움을 앞두게 됩니다.
그는 무작정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외교적인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지금의 상태를 좀 더 쉽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노력을 살펴볼 때 입다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언변을 가졌으며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사기 11장 12, 13절을 보겠습니다.
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13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
입다가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고 말하자 암몬 왕은 '내 땅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라고 말합니다.
서로 내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입다는 새로운 면을 보입니다.
우리는 입다를 창기의 아들로 잡류의 우두머리 정도로 생각합니다.
덧붙여 그냥 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입다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쫘악 꿰뚫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14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역사를 잘 아는 똑똑한 입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지금 논쟁이 되는 영토 즉 아르논과 압복 사이의 영토가 이스라엘의 것임을 변증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땅을 취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취한 땅은 모암과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를 근거해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이 땅은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입다는 학식도 없는 그저 힘만 센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과 함께 지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민족의 역사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이야기합니다.
그 땅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모리인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에게 친히 준 땅이라는 것입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24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암몬인들은 너희들의 신인 그모스가 주는 땅을 받았고 우리 즉 이스라엘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는 말을 통해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즉 한 민족이 그 민족의 신이 주는 땅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25절부터 입다는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 합리적, 이성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시혼 왕에게서 땅을 빼앗을 때 모압 왕이 자기 것이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을 언급합니다.
이 사실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을 인정한 것이며, 그 땅은 역사적으로 모압의 땅이나 암몬의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00년이나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지금에 와서 암몬 왕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합니다.
그리고 입다는 끝으로 그 땅을 주신 여호와의 이름을 또 언급합니다.
27절 하반절입니다.
27 ...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정말 뛰어난 입다의 언변입니다.
그만큼 입다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암몬 왕은 입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말로 하면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죠.
이제 남은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전쟁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일을 볼 수 있습니다.
29절입니다.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을 보내신 것입니다.
사실 입다는 여호와의 이름을 자신의 이익 때문에 거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입다를 사사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을 보내십니다.
이는 입다가 이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랑해서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런 입다를 택하신 하나님,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배신만 때리는 이스라엘을 여전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입다는 곧바로 전쟁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과정은 아마도 입다가 군사를 모집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서 어이없는 아니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 이제 등장합니다.
입다가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서원의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30, 31절입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전쟁을 이기게 하시면 나를 제일 먼저 맞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왜 입다는 이렇게 서원해야 했을까?
왜 입다는 서원이라는 것을 할 정도로 급박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입다에게 이 전쟁은 그의 인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승리하면 머리가 되지만 지면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어집니다.
그동안 쌓은 것도 다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입다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또 생각해 봅시다.
이 전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입니까?
이 전쟁은 암몬 자손이 강해져서 생긴 것입니까?
암몬 자손은 왜 강해졌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셨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에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순종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입다의 이 서원을 잘 보면 이것은 헌신, 봉사, 순종의 의미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거래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좋아하시고 제물 좋아하시니까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면 그거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부분입니다.
'하나님 이번 이 일만 잘 넘어가게 하신다면 교회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만 된다면 정말로 하나님 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번 사업만 잘 된다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 아니 십삼조를 드리겠습니다'
입다의 이런 서원을 우리도 잘 사용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전쟁은 승패가 결정된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승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면 그 전쟁은 100% 이기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나오는 전쟁은 허무하고 황당한 전쟁입니다.
군사가 없어도, 무기가 없어도, 왼손잡이라도, 여성이라도 이기는 전쟁입니다.
여기서 서원하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 외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내가 서원했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내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한 서원입니다.
입다가 나가서 싸우면 이기는 싸움인데 입다 혼자 쇼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실 작정이시면 아무리 서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예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고집이 우리의 '서원'이라는 무기보다 더 셉니다..
물론 서원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다는 이상한 서원을 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후회를 하게 됩니다.
전쟁의 결과는 32, 33절에 나옵니다.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승을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34절입니다.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처음 자신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자신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쟁에 승리하고 나면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노래하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입다의 딸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입다가 잘못입니다.
입다에게 그 딸은 무남독녀였습니다.
유일한 소생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입다입니다.
그런데 그 입다가 이제 또 실패를 합니다.
입다는 부모를 평생 욕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자신의 부모를 원망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입다가 이제는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면 이 서원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입다는 딸을 향하여 말을 합니다.
35절입니다.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라고 말합니다.
딸로 인해 괴로워하는 입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먼저 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무남독녀 딸을 두었고 이런 어리석은 서원을 했다면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간구했을 것입니다.
딸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딸을 번제로 바치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았겠죠.
하지만 입다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서원을 지킵니다.
인간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교도적 생각입니다.
이방인들의 방식입니다.
잘못된 서원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 이번 일만 잘 넘기게 하신다면 매일 굿판을 벌이고 돼지머리를 매일 바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집안에 부족을 붙이고 무당도 많이 두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사사시대에 아주 걸맞은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서원을 스스로 하고 그것을 지키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잘못된 서원은 바로 고쳐야 합니다.
하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바치기로 합니다.
그리고 딸의 마지막 부탁에 ‘가라’고 한 마디 하는 모습을 봅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잘 알았고,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외교적인 능력도 있었고, 말도 아주 능숙한 자입니다.
하지만 가장 잘 알아야 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는 도리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나님을 잘 이용한 자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님 편에 선 자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자기의 편에 두기 위해서 애쓴 자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편임을 사람들에게 더 보이기 위해 서원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입다!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사입니다.
입다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말씀하고는 있습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어리석은 하나님의 도구 사사 입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 모두가 부끄러운 수식어를 버리고, 부끄럽지 않은 멋진 수식어를 붙였으면 합니다.
잠언 25장 13절을 끝으로 보겠습니다.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사사 입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음식을 먹다가 탁 막힌 것 같습니다.
나의 모습은 입다와 다른 '충성된 사자'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얼음냉수' 같은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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