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설교] "룻기(7) 생명보다 나은 인애"(룻 2:17~23)

소리유리 2024. 2. 1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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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어떤 일들이 있으셨습니까?

좋은 일? 좋지 않은 일? 

주변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인터넷, 신문,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읽고 듣습니다. 

좋은 소식보다는 좋지 않은 일들이 많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화가 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전환점이 오길 기대합니다. 

사실 기적같은 일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 기적같은 일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우연이나 기적 같은 일들이 등장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룻기도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입니다. 

오늘 룻기 7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나오미라고 이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나오미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봐야 합니다. 


나오미. 그녀는 자신의 삶을 베들레헴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대로는 안된다.

뭔가 이 상태에서 벗어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견디겠다.

못 살겠다."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한 마디로 '변화가 필요하다! 전환점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룻이 자신을 따라왔지만 먹을 것이 없어 곡식 주으러 가는 상황이 비참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오늘 본문이 등장합니다..
룻기 2장 17~23절 말씀입니다.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저녁까지 열심히 보리를 줍습니다.

그리고 그 양이 한 에바쯤 되었다고 말합니다. 
한 에바는 22리터 정도 됩니다.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얼마나 많은 양인가 하면 보통 남자 노동자의 배급량이 하루에 0.5리터에서 1리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 에바나 되는 보리는 나오미와 룻의 몇 주간 버틸 수 있는 식량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셜록 홈즈 추리소설 중에 거지로 분장한 신문기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사를 쓰기 위해서 거지로 분장했다가 거지수입에 놀라 그냥 거지로 그 자리를 지켜가려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소설에 나오는 기자 거지의 수입을 생각나게 하는 룻입니다.  

 

룻은 하루에 몇 주치의 양식을 가져옵니다. 
이 모습에 나오미가 놀랍니다. 

너무 놀란 나오미는 '수고했다, 고생했다' 등의 말이 아닌 '어디서 주었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를 먼저 묻습니다. 


연륜 있는 나오미는 룻이 주어온 보리가 이 밭 저 밭을 기웃거리며 주어온 양이 아님을 보는 순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이렇게 많이 주워올 수가 없다'라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룻이 음식도 가져왔기에 더욱 나오미는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할 정도로 감격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온 나오미에게 드디어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에 싸인 나오미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말이 전해집니다. 

 

룻은 자신을 돌본 자가 즉 나오미가 말한 복 받을 사람이 바로 ‘보아스’라는 밝힙니다.

곡식과 음식에 놀라고 '보아스'라는 말에 나오미는 많이 놀랍니다. 

나오미는 감격해서 말합니다. 
20절입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사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의 의미는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튼 나오미는 룻의 말을 통해서 놀라운 우연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이끄실지 기대하게 됩니다. 


룻은 나오미의 이야기를 듣고 보아스가 자신에게 한 말을 전합니다.

21절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나오미는 룻의 이야기를 듣고 기대에서 확신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룻의 말을 살짝 바꿉니다. 

22절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뭐가 바뀌었는지 아십니까? 

소년 자리에 소녀가 슬그머니 들어갑니다.  

나오미는 이미 룻과 보아스의 결혼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 이후에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단어가 오늘도 등장합니다. 

룻의 중심 단어인 인애입니다. 

20절입니다. 다시 살펴볼까요?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이 구절에서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에서 은혜가 바로 인애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인 그 인애가 은혜로 번역되어 말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그치지 아니하는도다'는 말은 ‘버리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있는 자와 사망한 자에게 결코 인애를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인애의 의미에 대해서는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약한 자가 곤궁에 처해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자발적인 충성과 헌신,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나 산자를 막론하고 그의 백성이 곤궁에 처해있을 때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과 헌신을, 인애를 이제 나오미가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채워가시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희망을 갖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는 텅 비어지는 경험을 종종 합니다. 

마치 머피의 법칙처럼 내가 하는 일마다 되지 않습니다. 

저도 많이 경험합니다.

내가 특별히 무슨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잘 되지 않습니다.

채워지기는커녕 계속 비워져만 갑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이렇게 삶이 텅 비워져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도와주시기는커녕 마치 나의 반대편에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가 가장 위험하지만 나중에 그 일이 지나고 나면 가장 은혜의 때이기도 합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모세라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점점 아주 텅텅 비워져 갑니다. 

하지만 그 비움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비움이 종착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의 채움이 종착점입니다. 


결국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비워져 가더라도 하나님이심을 내 삶에서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인애를 베푸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아는 것!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즉 지금 나의 삶이 정말 형편없이 보이고 하나님께서 마치 나의 대적처럼 느껴지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인애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인가... 시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시편 63편 3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 생명보다 나은 인애!

그것을 이제 나오미와 룻이 맞보아 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인애를 삶에서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인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까? 
삶이 텅 비어져 갈 때 그리고 도무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인애를 여전히 기다리며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인애는 생명보다 낫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인애입니다. 
그 인애가 생각지도 못할 때에 나오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라의 나오미가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곧 우리의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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