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그리스도인의 확신(2) - 기도응답의 확신(1)"(겔 36:37, 38)

소리유리 2024. 2. 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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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은 '그리스도인의 확신' 주제로 설교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구원의 확신'을 말씀드렸고 오늘은 '기도'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정확하게는 '기도응답의 확신'입니다. 

확신이라는 말은 '의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의 확신'이라는 말은 '기도를 하고 응답받을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책을 좋아해서 좀 많이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구약, 신약, 교리, 교육, 상담 등으로 정리합니다. 

또한 인물별 또는 주제별로도 정리합니다. 

한 주제에 있어서 가장 많은 책은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책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응답'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생활을 하고 응답에 관심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기도는 많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개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 의미로 기도는 '신이나 부처에게 비는 일 또는 그 의식, 기구'라고 합니다. 

'빈다'는 의미는 '소원대로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소원'은 '원함 또는 원하는 바'를 말한다고 합니다. 

종합적으로 '원하고 바라는 바를 신이나 부처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를 일반인들처럼 이렇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아닙니다.

그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가지 것들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임세일 목사님이 쓰신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책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도 이 책을 많이 참고하고 그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요? 

그것에 앞서 이것을 먼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왜 기도할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무감에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 서로의 예의 표명 수단으로 기도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 보려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의무감에서 당연히 해야 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가 오늘 신경 쓸 부분은 문제해결, 소원성취 부분입니다. 

앞부분에 책을 말씀드리며 응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 혹은 ‘일만 번 응답받은 조지뮬러의 기도’ 같은 책을 좋아합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를 무엇인가 이루기 위한 방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입니다. 

'왜 기도할까?'라는 질문에  '응답받기 위해서, 응답받을 것이 있기 때문에'란 답이 맞는가? 

기도에 그러한 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응답차원에서 성경을 찾아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누가복음 11장 9, 10절입니다.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이루어주신다. 반드시! 

그래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아주 아주 열심히 기도합니다. 

 

첫 번째 아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이루어주신다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주시고, 찾고, 열어주실 것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입니다. 

 

바로 두 번째로 넘어가 볼까요.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면 꼭 이뤄질까요? 

작정기도,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365일 내내 하면 내가 소원하는 바가 반드시, 꼭, 기필코, 이루어질까요?

하박국 1장 2절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주 열심히 기도합니다.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십니다.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흔히 그리고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은 네게 잘못이 있어서다.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데 반응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 9절입니다.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복음 전도에 목숨을 걸고 사역하는 사도바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의 가시로 힘들었던 사도 바울은 3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육체의 가시 없애달라고 하니까 그걸로 만족해!라는 말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도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기도를 열심히 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두 번째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한다' 것입니다. 

 

세 번째 아주 특이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요나서 1장 3절을 봅시다.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도망갑니다. 

그런데 당시에 배가 자주 있지 않은데 마침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망치는 요나 기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지나친 해석일까요? 

시편 73편을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지만 내가 넘어질 뻔했다, 미끄러질 뻔했다. 

왜냐하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했기 때문이다. 

 

굳이 시편을 보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악인들이 풍성하게 걱정 없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교회도 다니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데 잘 됩니다. 

만사형통합니다. 

마치 기도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다 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응답해 주신다'입니다. 

 

네 번째는 말하지 않아도 다 추측하실 것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한다'입니다.

이 경우는 굳이 성경을 찾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도하면 응답받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고', '기도 안 해도 응답받고', '기도 안 하면 응답받지 않는 경우'가 나옵니다. 
도대체 기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 혼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오해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기도를 문제해결,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한 부분으로 기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도 아닙니다. 

'왜 기도할까?'에 있어서 '응답받기 위해서'는 탈락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응답은 당연히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속 기도 해야 할까?'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에스겔 36장 37, 38절입니다. 


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정결케 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줄 거야 하지만 달라고 해야 돼!

이상하죠?

아직도 기도를 응답차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다른 목적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후반부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응답에서 여전히 생각하고 싶으신가요? 

그럼 응답에서 결론을 먼저 내겠습니다. 

기도할 때 응답받는 비결은 벌써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노트도 적고 기도응답받은 날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응답의 기준은 내 말대로 그대로 될 때입니다. 

 

응답의 기준을 하나님으로 둘 때 완전히 달라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까요?

답은 언제든지 '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그 응답이 내 기준과 다르기 때문에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기준의 응답은 쉽게 'Yes, No, Wait'로 나누어 답해집니다. 

 

주방에서 칼을 달라는 자녀에게 엄마가 취할 행동은 아이의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취학 아동이면 '안 돼! No!'입니다. 

어린 학생이라면 아마도 '좀 더 기다려, Wait'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큰 아이라면 '그래, Yes'가 됩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Yes'만 응답으로 처리할지 모르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모두 다 응답했습니다. 

 

즉 나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설령 내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기도응답의 확신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기도응답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위치를 잊고 기도하면서 응답받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입장에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나의 요구대로 기도가 응답되어야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인가? 
쟈크 엘룰은 '기도와 현대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손에 넣는 방편이나 어떤 시스템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기로 작정하신 분 쪽의 자유로운 은혜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며 멀리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계신 분께 말씀드리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기도란 정확히 말해서 기술적인 절차가 아니라 하나의 기적이라는 사실”
(자크 엘룰 ‘기도와 현대인’)

 

여기서 꼭 기억할 말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기도 자체가 기적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라는 말을 다시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하는 것, 간구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할 수 있는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을 먼저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렇다면 왜 하는가?'입니다.

기도의 목적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하박국 선지자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자기의 욕심도 아니고 자신의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이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습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부흥 찬양의 가사를 작사합니다. 

하박국 3장 2절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하박국 선지자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고 하박국 선지자 생각을 바꿔버리십니다. 

마음을 바꾸십니다. 기도가 바뀝니다. 

그래서 이번엔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를 작사합니다. 

하박국 3장 17~19절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 마음, 생각을 내게 맞추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를 위해 사용하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나를 하나님의 마음, 생각에 맞춰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종,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내가 항복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금식이나 ‘나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는 웃긴 소리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고집이 더 셉니다. 

하나님의 고집은 영원합니다. 

환경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이 변하지 않고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 환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내가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만번 응답받은 기도의 비결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래, Yes'로 대답할 것들만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응답의 확신!

기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기준으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내가 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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