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세 번째 시간입니다.
룻기를 설교하고 준비하면서 많은 도전이 되고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합니다.
텅 빈 나오미를 보며 그 마음이 공감이 되고 나오미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기도를 합니다.
지난주 첫 번째 인애를 보이는 룻을 보며 나오미가 부럽고 인애를 기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룻의 인애를 보며 나의 인애와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2023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2024년 잘 지내고 계신가요?
너무나 편안하고 좋다면 룻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면 룻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실 겁니다.
... 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좋아하는 그 두 가지를 이야기하면 다들 저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까...
불과 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라이터와 맥가이버 칼을 가지고 다녔었습니다.
불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죠.
지금도 좋아합니다. 다만 가지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에 라이터로 유행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라이터 불을 최고로 올리고 입으로 빨아들이는 거죠.
나쁜 행동입니다. 따라 하지 마시길...
불은 좋아했지만 그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겁이 많아서...
그게 왜 유행했는가 하면 영웅본색 영화 때문입니다.
주윤발이라는 주인공이 그렇게 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웅본색.
오래된 영화라 잘 모르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에는 거의 모든 학생이 몇 번씩 본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등장하는 의리, 사나이들이 멋(?) 등은 많은 이들이 좋아했고 그들의 모습을 따라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도 그 영화를 몇 번이나 봤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비슷한 류의 영화들이 많이 등장했죠.
그런 영화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폭력배고 지금 흔히 말하는 조폭이지만 그들 가운데 보이는 의리는 아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의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건 의리', '죽음에 이르는 충성'
오늘 설교 제목이 '고집'입니다면 부제목을 정한다면 ‘죽음에 이르는 충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충성'은 룻기를 배우며 교수님이 하신 말입니다.
말이 좋아서 여기서 그대로 사용해 봅니다.
영웅본색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의리를 지금 시대에 찾아보기 힘들죠.
배신, 배반, 거짓 등이 우리의 사회에서 넘쳐납니다.
이러한 배신, 배반, 거짓의 모습은 심지어 교회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영원한 동지가 없는 시대입니다.
국제사회가 그렇고 우리들의 사회도 그렇습니다.
'나라'도 '사람'도 결코 손해보지 않습니다.
이익이 된다면 금방 얼굴을 붉히고 등을 돌린 사이라도 다시 금방 손을 붙잡고 '하하' 웃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의리', '죽음에 이르는 충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목숨을 건 의리', '죽음에 이르는 충성'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싸나이가 아니라 한 여인입니다.
또한 그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녀는 이방여인입니다.
그 이방여인이 죽음에 이르는 충성, 목숨을 건 의리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 1장 15~18절입니다.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5절입니다.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좋은 이야기도 자꾸 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또 이야기합니다. 오르바도 떠났다 너도 가라고 말합니다.
화가 날듯도 합니다.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자꾸 그럽니까?라고 말이죠.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가기로 한 룻!
모르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한 순간 객기로 큰 소리를 치고 후회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룻이라는 여인...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어려운 결심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텅 비어버린 시어머니 나오미를 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심인가...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앞으로 좋아지리라는 보장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결심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제안을 거절하면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또 나오미는 이야기합니다. 가라고 말이죠. 짜증이 날만합니다.
게다가 이번엔 충분히 '네'라고 대답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습니다.
함께 하던 오르바도 갔습니다. 서로 의지할 대상이었을 텐데 동서도 없습니다.
때마침 시어머니가 이야기합니다.
'오르바도 갔다. 괜찮다. 너도 가라.'
게다가 강도도 더 높아집니다.
처음에는 네 어미의 집으로 가라. 다시 결혼을 생각해 봐라.
그다음에는 너희 길로 가라. 네 인생도 생각해 봐라. 그냥 이렇게 끝낼 수는 없잖냐?
그리고 이번에는 민족과 신을 이야기합니다.
네 민족을 버리는 것이고 이제 네가 섬겼던 신도 바꾸는 것이다.
룻은 모압여인입니다. 모압 지방은 그모스라는 신을 섬겼습니다.
살던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장소에 대한 변경도 있지만 사람이 바뀝니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입니다.
룻이라는 여인의 사람관계는 어땠을까요?
그녀의 모습은 베들레헴에 가서 칭찬을 받습니다.
추측하건대 그녀는 사람관계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내던 터전을 옮긴다는 것,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것도 어떤 이익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위해 옮긴다면 이해가 되지만 지금의 상황은 영 아닙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난 오르바라는 여인이 눈에 선합니다.
나오미도 언급을 하면서 떠나라고 합니다. 마음이 움직일만합니다.
그런데 룻은 고집합니다.
16절입니다.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제 강권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어머니 가시는 곳, 머무는 곳에 함께 하겠습니다.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전의 민족과 신을 버리고 어머니 백성,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룻의 고집을 보십시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주 강력합니다.
룻의 고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7절입니다.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이건 그냥 하는 이야기로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는 허풍이 아닙니다.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여 주장할 때 쓰이는 속담으로,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면 큰 육체적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호언장담과 유사한 의미지만, 이 발언이 좀 더 과격한 느낌을 가진다고도 적혀있습니다.
룻의 말은 과격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허풍, 과격한 말이 아닌 진짜입니다.
고대 근동 아시아엔 가족묘라는 것이 있습니다.
연한 암석에 굴을 뚫거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합니다.
식구 중 누가 죽으면 무덤 안에 사람 모양으로 파놓은 홈 안에 시신을 안치합니다.
그리고 그 시신의 살이 썩을 때까지 놓았다가 나중에 뼈만 추려서 그 아래 파놓은 석실 안에 보관합니다.
결국 식구들의 뼈는 석실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조상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이와 같은 장래 풍습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룻의 말은 허풍, 과격한 호언장담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충성, 목숨을 건 의리를 통해 인애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아주 멋지게 말을 마무리 합니다.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어떻게 이렇게 멋진 말을 하고 결심을 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은 룻의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아주 대단한 신앙심이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룻이라는 여인이 이러한 결심을 할 때에 그 정도의 신앙이었을까?
냉정하게 전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도 룻의 신앙심보다는 참된 인애를 위한 충성과 자기희생적 헌신이 더 보입니다.
룻의 인애가 강조되는 장면입니다.
인애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애를 베푸는 데에 고집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지켜낼 고집이 필요합니다.
내 상황에 따라 바뀐다면 약자는 더 상처를 받습니다.
룻은 사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처럼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이죠.
나중에 그의 뛰어난 믿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보다는 룻의 죽음에 이르는 충성이 더 강조됨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 이 부분이 그래서 더 좋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가 보여주는 인애의 참된 모습!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인애를 베풀기 위해 고집 피는 룻은 보며 믿음 좋은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직은 믿음의 초보자라 생각되는 룻은 신앙심이 좋은 우리들 보다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룻이 대단합니다.
이러한 인애... 죽음에 이르는 충성을 보이는 것!
더욱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향한 이러한 충성을 보인다는 것은 대답합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사이는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나오미에 대한 룻의 충성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룻은 여호와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충성을 맹세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 아시아의 사람들은 맹세나 언약을 하면서 동물을 죽이고 반으로 가르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동물을 반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우리가 그 언약을 맹세를 깨면 이 동물처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로 맺어진 약속이라는 것이죠.
룻이 그러한 의식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진지하고 굳건한 결심을 하고 맹세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손해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주변 사람들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에 대해서 세상의 사람들과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 다니고 봉사하고 기도회 때 울고 불고 부르짖기도 하고 헌금을 많이 드리기도 하지만...
나오미에게 보여준 룻과 같은 죽음에 이르는 충성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보이고 있는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고집’이라고 했습니다. 룻은 고집합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말을 세 번이나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관철시킵니다. 통과시킵니다.
이러한 고집, 죽음에 이르는 충성, 그 인애를 우리가 배웠으면 합니다.
인애에 고집이 필요합니다.
내가 한 말은 지켜야지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집합니다
인애의 의미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약한 자가 곤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사랑과 충성의 삶'
본래의 인애의 의미에 고집을 추가하십시오.
인애의 기준은 약한 자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나오미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강권했습니다.
텅 빈 나오미를 채우는 것은 룻의 인애, 고집입니다.
그만큼의 인애, 고집을 우리가 초보자 룻에게 배워야 합니다.
룻과 같은 고집을 부릴 수 있는가?
인애의 중심에 내가 있다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생색내기에 급급합니다.
인애의 중심은 약한 자임을 기억하고 고집을 부려야 합니다.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
내 고집이 약한 자를 열등감에 빠뜨리거나 고집부리는 내가 우월감에 빠지면 안 됩니다.
약한 자가 나의 충성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충성, '목숨을 건 의리' 말입니다.
시어머니의 세 번이나 되는 강권에 아주 고집불통인 룻의 모습!
그 인애를, 고집을 의리를, 충성을 우리가 배우길 바랍니다.
2024년 인애를 배우고 실천하는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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