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교회에서 수요예배 후에 청년들과 교리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교재는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1권’으로 613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입니다.
1권이라는 말은 2, 3권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는 분이 청년들이 이 책으로 공부한다고 하니까 아주 놀라워합니다.
하지만 청년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읽고 공부해야 할 필독서입니다.
꼭 이 책이 아니라도 교리에 대해서 성도들은 알아야 합니다.
요즘 책을 잘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또한 읽어도 내용이 쉽고 가벼운 책들, 간증서적들을 주로 읽는 성도들에게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닙니다.
그때 공부하던 청년들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공부하는 가운데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청년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 자체도 좀 어렵지만 어떤 글은 말은 이해가 되는 데 내용이 다른 의미로 어렵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용에 수긍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동안 생각해 오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 부분 중에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는 신론에서 많은 의문점들을 제게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 속성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오류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오류, 착각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왔고 그렇게 믿는 것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 그러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39편 7~10절입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는 '아멘!'으로 받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부담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고 합니다.
쉽게 '하나님이시니까 그렇지'라고 넘길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하늘에도, 스올에도, 바다 끝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착각 중에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인정과 이해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성경공부 또는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가질 때에 가장 먼저 ‘인정과 이해’에 대해 공부합니다.
인정은 ‘확실히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고, 이해는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정과 이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인정과 이해는 더욱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인정해야 하는가?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빛, 궁창, 식물, 육지와 바다, 해와 달과 별, 새와 물고기, 동물 그리고 사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첫째 날로 시작되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창조하신 것들을 열거하라고 하면 창세기 1장에서만 열심히 찾습니다.
또 있습니다.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라고 합니다.
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재료조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창조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이성, 사람의 마음, 미각, 후각, 청각 등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가족, 사회, 국가도 사람이 만든 것처럼 착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에서 나왔습니다.
쉽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시간과 공간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공간을 점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즉 위의 그림처럼 태초에서부터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이라는 말은 지금부터 끝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원이라는 말의 정의는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영원이라는 단어는 ‘Eternity, permanence, perpetual, everlasting, forever’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이 단어와 다른 의미의 영원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timeless'입니다.
다시 위의 그림을 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셨을까요? 당연히 존재하셨죠.
시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계셨기에 시간을 창조하셨죠.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렇다면 시간 이전에 하나님은 어떻게 계셨을까요?
이 부분을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더 복잡해집니다.
한 마디로 모른다고 빨리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영속성, 무한성 속에서 영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자체를 초월하신 '영원'[timeless]입니다.
이를 무시간성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시간 자체를 초월해 계신다는 말이죠.
좀 이상한 말이지만 하나님께는 현재도 현재, 과거도 현재, 미래도 현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신 분이십니다.
시간을 창조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제약받지 않으십니다.
시간 자체를 초월한 '영원(timeless)'하신 존재이십니다.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공간에 제약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공간을 점유합니다.
그리고 여러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초공간적인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spaceless’라는 단어가 바로 하나님의 공간에 제약받지 않으심을 이야기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나라에서 기도해도 다른 어떤 나라에서 기도해도 동시에 들으시고 동시에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계셨던 분이시고 그 공간에 어떠한 방해나 제약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139편이 그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간을 창조하시고 공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 이전, 공간 이전에 계셨던 하나님의 상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을 때에, 공간이 없을 때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실까?
다만 시간과 공간 이전에 계셨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가 아닌 존재자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참 많습니다.
이해가 아닌 인정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서 설명해도 모를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빛은 첫째 날에 만드셨지만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첫째 날의 빛은 어떠한 빛일까요?
우리는 빛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꼭 햇빛, 달빛, 별빛, 형광등빛, 스마트폰빛 등 빛의 주체를 이야기합니다.
발광체가 있고 그 발광체에서 빛이 나옵니다.
하지만 첫째 날의 빛은 도대체 어떠한 빛인지 모릅니다.
이에 대한 많은 의견과 주장이 있지만 답은 모릅니다.
성경에 적혀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고 싶어도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위치를 확인해야 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차이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신인 교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삼위일체와 다른 여러 교리에 대해 그러했듯이, 우리의 할 일은 이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경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성경에 있는 그것을 그냥 확실히 그렇다고 여기고 인정하고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그다음에 이해를 요구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주석을 쓰면서, “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하면서 결국 나는 여기까지밖에 모른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정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즉, 이해와 인정의 경계선을 잘 가져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모르고 무조건 '아멘 아멘'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침묵하십니다.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굳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이론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수준이 되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수준이 낮아 모르겠지만 높아지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우리의 수준으로 끄집어 내리는 것입니다.
끄집어 내린 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 이성의 범주에 넣는 것입니다.
이성과 합리에 맞추어 하나님을 최대한 이해하고 그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이 되는 것도, 하나님을 우리의 수준으로 끄집어 내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그 두 가지를 다 시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의 범주에 집어넣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성경내용도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다 절대로 불가능하며 그러한 시도는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정과 이해!
어려운 부분입니다.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고 인정해야 하는가?
무조건 이해만 하는 것도 인정만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균형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먼저는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무 편하고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편하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내 요구와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나의 착각을 깨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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