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달을 마무리하며 2월의 계획을 새롭게 세워가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착각'이라는 주제로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오래된 퀴즈하나 풀어보죠.
엿장수가 첫 동네에서 가위질을 5번 했습니다 두 번째 동네는 10번, 세 번째 동네는 15번 했습니다.
네 번째 동네에선 가위질을 몇 번 할까요?
다 알고 있는 퀴즈입니다. 물론 20번이라고 하신 분은 없겠죠?
엿장수 마음입니다.
이 이야기를 고상하게 말하면 가위에 대한 엿장수의 주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위질을 몇 번 하느냐는 가위 주인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권이란 말은 국가와 관계된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오늘 살펴볼 주권은 말 그대로 주인 된 권리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나눌 내용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 말을 아주 쉽게 풀어쓰면 '하나님 마음대로 또는 하나님 뜻대로'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마음대로, 뜻대로 하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난주 하나님에 대한 인정과 이해라는 것을 설교했습니다.
그 말씀을 잊으셨다면 다시 읽고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합니다.
아니면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부분은 이해가 아닌 인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이와 관련되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 부분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권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하고 대부분 결론에 가면 인정할 영역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9장 20, 21절입니다.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나님 마음대로 귀히 쓸 그릇을, 천히 쓸 그릇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요즘 시대로 말하면 금수저, 흙수저로 표현해도 됩니다.
당사자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뜻대로 만드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불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모에 불만이 많습니다. 키, 얼굴, 몸매, 피부 등...
재능도 그렇습니다. 아이큐, 노래, 손재주, 말, 운동능력 등...
또한 내 배경 즉 부모님, 나라, 언어 등도 그렇습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할까?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면 거부감을 많이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립적 관계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둘은 결코 대립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허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제 자유의지라고...'
이 부분은 다음에 더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하나님의 주권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주인 된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엿장수가 가위질을 몇 번 하든 마음대로 하듯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크게 오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편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친구처럼...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예로 기도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실 기도에 대해서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은 기도가 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감지덕지입니다.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토기장이가 진흙의 의견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을 내 이성으로 이해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런 위치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피조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은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를 미리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알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임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람과 무생물입니다.
진흙과 대화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흙의 의사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려주셔도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자꾸 내 이성의 범주에 넣으려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금 딱딱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충분히 읽을만한 책입니다.
창조, 통치, 구원, 실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합니다.
읽으면 이해가 되면서 나와 관계된 이야기로 연결되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를 마음대로 만드셨습니다.
예를 들어 기린의 목이 길고, 코끼리 코는 길고, 어떤 동물은 초식동물이고 어떤 동물은 육식동물인 것에 대해서 누구 하나 시비 걸지 않습니다.
나무마다 종류가 있고 동물마다 종류가 있지만 ‘그 종류가 이렇구나’하고 연구하지 ‘왜 그렇게 생겼어, 맛이 왜 이래?’라고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맛보는 것... 그 모든 기준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그러한 규칙에 따라 살아갑니다.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왜 그것을 그렇게 느낄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와 관계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외모, 성격, 능력뿐만 아니라 환경 즉 나라, 부모님도 마음대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마음대로 세상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 마음대로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후회도 하지 않으시고 또한 하나님께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지금 우리 세상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통치, 섭리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줄 아신다면 왜 이렇게 방관하고 계십니까?라고 우리는 외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바로 인간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적용시키는 오류를 범합니다.
속성은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세상에 적용시키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네?’하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없습니다.
즉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돌발 사고도 없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고 공중의 새 하나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어떠한 사고나 사건도 하나님 모르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한 이야기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것입니다. 속성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열거할 수 있지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계시종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까지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말씀하신 부분까지를 알 수 있고 그 부분을 열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전체적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분이 되실 수밖에 없다는 말이 더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더 넘어가서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세상에 적용해서 어떠한 현상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닌 인정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하물며’라는 말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표현은 마치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으시며, ‘이 바보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여전히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이런 일이?’라는 우리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물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물며'의 믿음입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물며'입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이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진 마십시오.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내게 미리 각인시켜야 합니다.
분명 모들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물며'입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더욱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 그리고 나와의 차이 즉 나는 진흙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20, 21절입니다.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즉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이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나의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 마음대로, 지금 이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은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시고 어떤 것은 맛있고 어떤 것은 향기롭다고 느끼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말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가장 최선의 것으로 최상의 것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꼭 기억하십시오.
정말 감사한 것은 그 하나님이 선하시고 '하물며'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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