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착각(2)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어?"(창 1:1)

소리유리 2024. 1. 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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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에 이어 오늘도 착각시리즈입니다. 

하나님이 누구 편일까 착각하면 안 된다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입니다. 내 편이 결코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내가 믿는 믿음의 시작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오늘 본문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기독교는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론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성경의 시작 창세기의 첫 구절은 바로 천지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셨는지 그분이 누구신지가 아니라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시작입니다. 

 

구약의 앞부분 다섯 권은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기 위한 성경이 아닙니다. 

모세오경이라고 이야기하는 5권의 성경은 모세가 출애굽 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들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역사와 이적을 베푸신 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보다는 오늘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상황에 있습니다. 

출애굽, 이적, 기적 등을 경험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가 하는 부분도 의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믿는 '기독교'에 대해 착각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착각하는 몇 가지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교회에 같이 가자는 저의 말에 ‘교회를 왜 다녀? 나는 종교가 필요 없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친구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면서 ‘왜 기독교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냐’고 따졌습니다.

그 외에도 기독교는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며 로마가톨릭에서 분파한 기독교를 일컫는 것이라는 것!

또한 기독교는 바울이 만들었고 칼빈이 지금의 기독교를 만든 사람이라는 등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성립된 종교 단체 또는 그 분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는 ‘그 종교 단체 또는 분파에 속한 신교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친구는 흔히 하는 말로 아주 박식했던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박식함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그 자리에서 제가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지식도 부족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지 못했던 저는 그저 친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그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소 긴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려 합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적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름과 성별, 생년월일, 주소, 휴대폰 번호들…. 그리고 종교항목에서는 자신의 종교를 적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종교항목에 ‘기독교’라고 적습니다. 
종교항목에 기독교를 적는다는 것은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 즉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많은 종교 중에서 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종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답변은 ‘네’입니다. 

하지만 그 답변의 기준은 세상적인 기준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당당하게 ‘아니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종교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믿고 숭배하는 일의 총체적인 체계’라고 합니다. 

좀 다르게 설명하면 ‘자기의 유한성을 자각한 인간이 절대자의 실재를 믿고 의지하며, 그 무한하고 풍성한 사랑의 품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심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좌절, 실망, 불안, 공포 등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벗어나게 해 줌으로써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활력소가 되어 주며, 또 사회 근본 질서의 기초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라고 오래전에 배운 국민윤리 책에 적혀있습니다. 
 
국민윤리 시간에 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종교는 ‘사회를 통합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럼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도 사회를 통합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저는 ‘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기독교로 인해 사회가 분열되기도 하고 질서가 깨지기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사회를 통합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종교의 기능과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볼까요? 

종교와 기독교 중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일까요?

종교입니다! 

현대인들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이성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이지도 못한 기독교가 더 욕을 먹는 것입니다. 

 

기독교보다 다른 종교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말에 동의하기 힘드신가요? 

동의하기 힘들지는 몰라도 사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좀 어려운 말로 이를 ‘계시종교’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말은 감추어진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다 보여주시지 않고 일부분을 들춰서 보여주시는 것이죠. 

물론 다 보여주셔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만 알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이 만져본 부분만 압니다.

전체를 알 수 없고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다른 종교는 그 시작점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를 만들고 더 발전시켜서 종교가 되는 과정을 겪게 되죠. 

사람이 만들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게다가 사람이기에 수정 가능하기도 하죠. 
수정 가능하다는 말을 이렇게 예로 들어볼까요? 
 
만약에 제가 어떤 종교의 교주이고 제 교단에 천여 명의 신도가 있다고 합시다. 

제 나름대로 교리도 만들고 그것을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두 명의 사람이 그 교리에 대해서 결사반대하고 자꾸 반항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을 쫓아내거나 더 이상 그런 말을 못 할 정도로 징계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두 명의 의견이 폭발적인 반응을 입어 천여 명의 신도중에서 70, 80%의 신도가 따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과감하게 포용력 있는 교주로 그 의견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교리를 바꿔서 유지될 뿐 아니라 더 좋아진다면 바꿔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반대해도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기독교가 더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와 종교는 다릅니다. 

시작이 다르고 내용도 다르기 때문에 아예 다른 것입니다 
종교는 사회 통합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기독교는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정의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바로 '기독교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제 고등학교 친구의 말처럼 종교개혁 이후에 로마가톨릭에서 나온 것이 기독교일까요?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큰 집이고 기독교는 작은 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먼저 종교개혁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루터의 ‘95개 조항’, 칼빈의 ‘하나님의 절대주권’ 등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먼저 개혁이라는 말입니다. 

 

개혁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라는 의미로, 뜯어고쳐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현재 있는 것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죠. 

개혁해야만 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종교개혁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종교개혁의 5가지 강령입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입니다. 
 
문제가 생겨서 뜯어고쳐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어떤 원칙으로 해야 하는가 하면 바로 ‘성경으로, 은혜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와 그렇구나! 처음 알았네!’라고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그 시점에는 그렇지 않았기에 당연한 그것을 다시 외치게 되었습니다. 
 
개혁을 해야만 하고 또한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고, 틀어지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면 올바른 것으로 인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시작은 어디서 일까요? 

세상에서 말하는 종교개혁 때에 로마가톨릭에서 나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은 현재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제 다시 정상적인 길로 가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천지창조에서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족회의를 합니다. 

종교 난에 뭐라고 써야 하는데 종교 중에 무엇을 적을까 고민합니다. 

이것이 말이 될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 종교는 없습니다.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삶이었습니다.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고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치 선택인 것처럼 돼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기에 더욱 힘쓰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구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죄를 범하며 면죄부를 발행하고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를 외쳤던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을 제대로 믿자!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살자!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자! 
이것은 새롭게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야만 하고 지켜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종교개혁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왜 우리는 가톨릭과 비교할 때에 작은 집이 아닌가? 기독교가 바울이나 칼빈이 만든 것인가?”에 대하여 이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과 환경을 내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내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이는 너무나 큰 착각입니다. 

현재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점점 희귀해져가고 있기에 도리어 믿지 않는 자들이 더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 대하여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여야 하는가? 
 

고등학교 때에 교회 행사로 등산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산을 오르던 중 친한 친구가 슬픈 동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어느 원숭이가 숲에서 놀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긴 시간 길을 찾다가 다른 원숭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뛰어가 봤는데 원숭이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원숭이 눈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원숭이는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에 다른 원숭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몰려드는 원숭이들이 다 외눈박이라는 것입니다. 

두 눈이 정상인 원숭이는 도리어 놀라서 도망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물에 비추어보고는 한쪽 눈을 없애버리게 됩니다. 
 
그 친구는 제게 ‘네가 두 눈 가진 원숭이라면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던 저는 ‘다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세상이 그렇지 뭐…’라고 답했고, 친구의 반박에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외눈박이 원숭이만 사는 마을에 간 두 눈을 가진 원숭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정상적인 것이고, 필수인데 믿지 않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고 해서 두 눈 중에 한 눈을 없애버리는 원숭이처럼 살아가시겠습니까? 

 

원숭이는 조금만 더 기다리고 더 찾아봤으면 그곳이 비정상적인 외눈박이 원숭이들만 사는 숲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조금만 더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오실 것이고 우리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고 당연한 것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해서 하나님께 자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것임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비정상입니다. 
자신의 눈을 외눈박이로 만들어버린 어리석은 원숭이가 되지 마십시오. 

 

오래전에 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다른 아이들도 태워다 준 적이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교회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아이가 '왜 교회 다녀?'라고 물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 아이가 답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신 답했습니다. 

'어떻게 교회 안 다닐 수 있지?'라고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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