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시작과 함께 결심, 결단했던 것들을 잘 지켜가고 계십니까?
두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많은 일들로 힘들어하십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들 중의 사람관계는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회사나 가정 심지어 교회에서도 내게 맡겨진 일 때문이 아닌 그곳에 함께 하는 사람들로 힘들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고독의 시대입니다.
자기중심적, 이기적이며 혼밥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꼭 기억했으면 하는 단어를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룻기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나오미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룻의 중요한 주제인 인애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역을 하면서 청년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학교나 교회에서 매년 신입생이 올라오고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해왔습니다.
각 학번마다 자기들만의 특징도 있고 매년 변화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똑똑하다. 재능이 참 많다. 말도 참 잘한다. 옷도 잘 입고 잘 꾸민다 등...
그 가운데 안타까운 것도 있습니다.
참 개인적이다. 자기밖에 모른다. 절대로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을 잘 보이지 않는다.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상처를 많이 가지고 있다... 등입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개인주의, 자기 중심주의적인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회복하려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비전을 잘 수행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과, 동역자와 어떻게 잘 지내야 하는가? 또한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이 공동체에 해를 끼친다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상식선에서 벗어나지 않는, 기본적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선을 긋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는 것... 그것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그것을 오늘 본문과 연관 지어 ‘충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이 참 어색하게 들리죠?
군대도 아니고 무슨 충성이냐? 친구에게 무슨 충성?
일반적으로 충성이라고 할 때 우리는 굉장히 딱딱하게 느껴집니다.
사전적인 정의도 그렇습니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특히,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것을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드릴 충성은 다릅니다.
충성은 보통 하위자가 상위자에게 보이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순종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반대를 이야기합니다.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보이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입니다.
이러한 충성을 ‘헤세드’, 인애라고 합니다.
이 인애가 그리스도인으로 보여야 할 진정한 모습이라고 성경에서는 강조합니다.
정리해 볼까요.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인애'입니다.
인애란 '약한 자가 곤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사랑과 충성의 삶'입니다.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의무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충성' 등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개념은 약자와 강자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너무 냉랭하고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인애가 부족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인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성경에서는 말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찾아보죠. 미가 6장 6-8절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8절에 나오는 인자가 바로 인애 즉 헤세드입니다.
어떠한 번제물, 헌신, 종교적 행위의식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정의를 행하며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헤세드, 인애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번제물, 헌신, 종교적 행위의식 보다 말입니다.
그리고 룻기를 보면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저번 주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얼마나 텅 비어 가는 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텅 빈 나오미가 어떻게 가득 채워가는가? 바로 인애로 인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 1장 7~14절입니다.
* 본문 : 룻기 1장 7절~14절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늘은 인애가 시작됩니다.
첫 번째 인애는 바로 룻의 인애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아주 깨끗하게 텅 비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합니다.
그녀는 자존심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가는 길에 두 며느리에게 나오미는 말합니다.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사실 보통 과부는 ‘아비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어머니의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집이란 결혼에 관련된 문제들을 의논할 때 그 의논과 계획을 짜는 장소로 보통 쓰였다고 합니다.
즉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재혼을 염두에 두고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며느리가 아직 젊기 때문에 새 남편을 만나 새 삶을 살라는 것이죠.
이 말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포자기하는 그리고 불평 어린 그녀의 마음을 조금 읽을 수 있습니다.
즉 남편과 두 아들도 다 죽었는데 너희들도 다 가라.
너희가 간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 것이 있겠냐... 하는 절망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그녀의 말에서 더욱 그 느낌은 확실해집니다.
11~13절입니다.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표현합니다.
얼마나 나오미의 삶이, 마음이 텅 비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어진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텅 비어진 그의 삶 속에서 더욱 고독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자신을 떠나가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설득까지 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떠나가라고 할 때 며느리를 향한 어떤 원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8~10절입니다.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8절에서 나오는 선대라는 말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인애입니다.
두 며느리가 얼마나 행동을 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이러한 대화가 오고 가는 과정은 베들레헴으로 다시 가는 길입니다.
즉 가는 중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며느리는 나오미를 붙듭니다.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다시 두 며느리에게 말하고 결국 오르바는 떠나고 룻은 남습니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가 떠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면서 오르바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두 며느리는 나오미에게 인애를 베풀었습니다.
또한 오르바가 먼저 나오미에게 떠나겠다고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오르바는 나오미를 쫓아 나오미의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오르바 보다는 나오미가 더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과부가 셋이 모였습니다. 그 과부 셋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오미는 재물도 없고 그는 모든 것이 텅 비었습니다.
두 며느리에게 이방의 나라인 베들레헴으로 와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르바의 결정은 나오미를 떠난 것은 결코 불충성이 아닙니다.
여기서 오르바가 떠남으로 더욱 빛나는 것은 바로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즉 오르바는 잘못된 결정을, 비난받을만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끝까지 나오미의 곁에 남는 룻의 인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룻, 그녀는 굳이 나오미의 곁에 남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향으로 가서 나오미의 말대로 재혼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룻기를 살펴보면 룻이라는 여인의 매력과 그녀의 능력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에게 인애를 보입니다.
강자와 약자는 상대적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누가 강자인가? 선입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확실합니다. 룻이 강자고 나오미는 약자입니다.
아주 텅 빈 여인이 나오미입니다.
그리고 룻은 그 약자에게 강자로서 자발적인 헌신과 사랑, 충성을 보입니다.
곤궁에 처한 나오미에게 끝까지 충성을 하기로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인애입니다.
이러한 인애로 인해 룻은 룻기에서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사실 룻은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 아닙니다.
돌아왔다는 것은 이전에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룻은 모압에서 온 여인입니다.
그런데 룻을 가리켜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즉 룻은 나오미에게 보인 인애를 통해 진정으로 모압에서 여호와에게로 돌아온 여인이 됩니다.
점점 냉정해지고 자신만을 아는 이 시대에, 너무나 차가워서 따뜻함을 느낄 수 없어서 그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그러한 것들을 대리 만족하는 우리들에게 룻의 인애가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약한 자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사랑과 헌신, 충성”
우리의 삶에 인애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인애가 아닌 나의 인애가 필요합니다.
이 인애의 힘은 아주 강력합니다.
앞으로 살펴볼 룻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공동체에 나로 인한 인애가 넘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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