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설교] "룻기(1) 하나님께로"(룻 1:1~7)

소리유리 2024. 1. 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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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룻기로 시작합니다. 
룻기는 성도들에게 인기 있는 성경은 아닙니다. 등장인물이 화려하지도, 유명하지 않습니다. 
4장으로 구성되어 금방 읽히지만 기억에 나는 구절 또는 극적인 장면도 없어 보입니다.  
한 마디로 룻기에 대해 잘 모르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66권 중의 한 권으로 에스더서와 함께 여성의 이름으로 된 책이다. 
조금 더 안다면 룻기가 '시대적으로 사사시대였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는 다릅니다. 
세계적인 많은 문학가들 예를 들어 단테나 밀턴 같은 사람들에게 룻은 영감의 주인공이었다고 합니다. 
단테는 이삭 줍는 소녀를 그릴 때 룻을 모델로 사용했고 밀턴은 덕이 많은 젊은 여인의 모델로 룻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독일의 대문호가인 괴테는 룻기를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은 스토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들은 룻기에 대해 별로 재미없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문학적으로도 룻기는 아주 중요하고 뛰어난 책입니다. 
또한 한 신학자는 룻기를 사사기와 사무엘서라는 딱딱한 조개껍질 사이에 끼어 있는 진주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룻기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시작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이 룻기가 성경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주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답변은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좀 더 중요한 답변은 룻기의 가장 뒷부분을 보면 다윗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란 이름이 나오면 반갑죠. 
 
다윗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성경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님으로 연결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꼭 기억할 것은 '룻기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경이다'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 1장 1~6절입니다.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첫 시작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로 시작됩니다. 치리하던 때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그 시기. 이 말은 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사기 마지막 절인 21장 2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시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왕이 된 시대입니다.  
 
그 좋지 않던 시기에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입니다.
그의 가족은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의미는 ‘떡집’입니다. 그런데 그 떡집에 흉년이 듭니다. 
 
엘리멜렉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기쁨을 뜻하고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 이름으로 수확이 많다는 뜻입니다.
즉 수확이 많은 떡집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거하는 땅은 가나안 땅에 속해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죠. 
떡집, 수확이 많음, 젖과 꿀, 약속의 땅인데 그곳에 기근이 들어 고통, 고난,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사사들이 살던 그 시기,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불안했고 더구나 지금 수확이 많은 떡집에 흉년까지 듭니다.
이 흉년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흉년이 왔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잠시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부분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인과율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고통과 고난도 어려움도 피해 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또한 고통과 고난을 겪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결과로 착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꼭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재난을 당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점은 그 재난을 당했을 때 어떠한 행동과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엘리멜렉은 가족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거류하게 됩니다.
여기서 거류했다는 말은 잠시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즉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것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음을 당합니다. 왜 죽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흉년이 들었다고 하나님의 언약의 땅인 가나안 땅을 등지고 모압 지방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말은 아닙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굳이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을 꼭 죄에 대한 심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의 초점은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죽은 후에 가족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다는 것이죠.
이제 중심이 바뀝니다. 엘리멜렉에서 나오미로 말입니다.
 
계속 살펴보며 말하겠지만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 아닌 나오미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미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남편이 죽은 후 잠시 기쁨이 찾아옵니다. 두 아들이 결혼을 합니다.
결혼은 이제 대를 잇는 것임을 의미하기에 나오미에게 기쁨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또 발생합니다.
 
두 아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것을 두고 또 두 아들이 이방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엘리멜렉 때와 마찬가지로 기록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왜? 죽었을까?'를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제 또 남은 사람입니다.
말씀 그대로 ‘그 여인’이 두 아들과 남편 뒤에 남게 됩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인과 이유를 찾는데 익숙합니다.
왜?라는.
하지만 종종 아니 자주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왜?라는.
문제와 갈등이 닥쳤을 때 그것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끔 심각한 문제에 부닥쳐서 열심히 기도하고 철야도 하고 금식도 했는데 영 반응이 안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장면은 많이 등장합니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 외에 순교한 많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정말 착하고 순종적이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인 사람들인데 고통과 고난과 갈등을 겪습니다.
여기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좋아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책임한 말 같지만 그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이겠지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왜? 왜?'를 연속적으로 외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왜?'라는 메아리밖에 없습니다.
 
오늘 나오미가 그렇습니다.
수확이 많은 풍성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그것도 떡집인 베들레헴에 왜 흉년이 들었을까?
잠시 간 모압 지방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원인도 모르게 죽었고 잠시 기쁨이 있는가 했더니 두 아들이 자녀도 없이 왜 죽었을까? 
 
그리고 이제 홀로 남았습니다.
며느리가 있지만 남편과 아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나오미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혼자 남았다는 것입니다.  
고독과 외로움, 아무도 없는 그 상황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 이국 땅에서 홀로 남은 나오미의 심정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듭니다.
아주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잠도 오지 않고 두통과 온갖 없던 질병이 생길 지경입니다.. 
 
스트레스 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인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일로 1위는가 자녀의 사망입니다.
그리고 2위가 배우자 사망입니다. 나오미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겪습니다.
 
현대인들 중에 많은 이들이 고독과 우울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공황장애로 인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나오미가 현대에 산다면 병원을 다니며 치료받고 매일 약을 먹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룻기는 나오미가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전체 내용의 흐름을 보면 이렇습니다.
룻기 시작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얼마나 텅 비어지게 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룻기가 진행되면서 결국 룻기의 마무리로 가득 차게 되는 나오미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룻기 시작의 나오미.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죠.
나오미 모든 것이 아주 텅 비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모든 것이 바닥입니다. 
속은 다 타버렸고 주위에 기댈 곳도 없습니다.
밤에는 자신이 당한 상황 때문에 가위에 눌리고 낮에는 머릿속이 터질 정도의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리고 수확이 많은 떡집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와서 남편과 자녀를 모두 잃어버린 나오미.
여기서 우리가 그에게 희망을 갖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살아남았다는 것! 그녀가 지금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녀가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것.
어떻게 보면 그녀가 남았다는 것이 큰 비극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욱 절망이고 더욱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남은 자를 통해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주 텅 비어버린 나오미의 삶을 언젠가는 결국 가득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벼랑의 끝에서 남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물론 지금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당사자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당장 이해하고 해결점이 제시되길 원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지독할 만큼 침묵을 유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으며 순종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닥쳐온 고난, 고통, 그것의 원인을 도저히 알 수 없는 막막함,
가슴에 파고드는 고통과 압박, 숨이 막혀오고 당장 이 세상을 끝내고 싶은 절망감.
나오미가 겪고 있는 상황은 우리에게도 닥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잘 따른다고 피해 가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언제나 올 수 있습니다. 이를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나오미에게 우리는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끝났죠. 우리가 기억할 부분은 이것입니다.
나오미가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나오미. 그녀는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아니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겠죠.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그렇게 하게 만드셨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을 주셔서 결국 하나님께 고개를 돌리게,
하나님께 울며 불며 무릎을 꿇고 기어가게 만드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절실히 깨닫고 결국 그분에게로 돌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결론이고 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이것을 적용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너무나 큰 현실의 벽이 나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보다 문제가 더 크고 강해 보입니다. 
발버둥 치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하나님보다는 내 이성을, 내 감정을, 내 능력을 더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을 향하십시오.
그렇지 않을 때에 결국 그분이 하나님을 향하게끔 하실 것입니다.
 
나오미!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해 달려가며 도움을 요청하는 나오미의 텅 빈 모습.
나오미 스스로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고 울부짖고 거지꼴로 구걸하듯이 자신의 몸을 질질 끌며 하나님께 다가가는 절박함.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봅시다.
자신의 자녀에게, 사랑하는 나오미에게 고통과 고난과 쓰린 너무나 아픈 마음의 상처를 주시면서까지 나를 바라보라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
 
어느 쪽이 더 절박하고 힘들었을까?
부모의 매를 맞고 정신 차리고 울음을 터트리고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달려드는 그 자녀의 마음과
자녀가 아플 것을 알면서도 때리고 때리는, 자녀가 깨닫고 알아들을 때까지 마음 조리며 기다리시는 부모의 마음.
 
기다림!!
하나님께선 나의 기다림보다 더 큰 놀라운 기다림으로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하게끔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기까지 그분의 마음을 우리는 느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과 고난과 아픔보다 더한 십자가의 고통을, 사랑하는 자녀를 때리면서까지 스스로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리시는 그분의 시간과 눈물을.
 
제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하소연합니다.
그분의 기다리심에 이제쯤은 응답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나오미처럼 남편과 자녀 그리고 모든 것이 텅 비어야만 하나님께로 다가가며 그분의 기다리심에 응답할 건가요??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는가라는 반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금은 알 수 없기에 여전히 '왜?'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룻기 후반부에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초점은 혼자 남은 나오미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모두를, 전부를 그분의 기다림에 응답하십시오.
나의 비전, 이성문제, 결혼문제, 친구문제, 직장문제, 가정문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되도록,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나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외는 없도록 말입니다. 
나오미는 결국 그분께로,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하나님께도 돌아갑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도 나오미의 뒤를 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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