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사랑(1) 이웃 사랑 - 눈엔 눈"(출 21:22~25)

소리유리 2023. 12. 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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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가장 많이 사용하고 듣고 싶어 하는 말입니다. 
많은 드라마, 영화 그리고 노래에서 사랑을 주제로 하고 그것을 보고 듣으며 같이 공감하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기도 합니다.
 
‘사랑’. 그 단어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그만큼 사랑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강력한 힘이 있는 사랑을 생각하면 이성 간의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따뜻함을 느끼고 감동하며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랑은 이성에게 보다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평범한 이웃들을 통해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이성 간의 사랑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사랑은 이웃 간의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기독교에 그 책임을 떠맡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책임을 떠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실천하고 제일 많이 표현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며 그 사랑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그리고 가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그 사랑은 너무 무모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것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기준 없이 무조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랑을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가?
 
또한 사람들은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감정적인 요소만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사랑에도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 부분은 너무나 잘 알아서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와 ‘의’에 대한 요소가 많이 부족합니다.
사랑은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워야 하고 더 노력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성경에서 그러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러한 사랑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 출애굽기 21장 22~25절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기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읽고 주일 교회에 와서 봉사도 하지만 가끔씩 나의 모습을 보면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일까?”하는 고민에 빠진다는 것이죠.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교회에서의 모습, 가정에서의 모습, 직장에서의 모습, 학교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어떤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직장 동료를 만나면서 “아니 당신도 교회 다녔어?”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 아니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해결책은 바로 합리화입니다.
스스로 수준을 낮추어 “나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야”라고 그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달라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못하는 것을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기 때문입니다. 혹은 회사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해도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그것까지 다 때우려고 합니다.
 
친구도 구분합니다. 교회 친구와 세상 친구 그리고 구분된 그 상태를 합리화하며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양면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건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을 아주 많이 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오늘 본문은 이런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는 본문이 아니라 그들을 더욱더 궁지로 몰아세우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또한 아주 유명한 성경구절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눈엔 눈, 이에는 이, 손엔 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본문을 그냥 쉽게 넘어가버립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을 한 후에 시내산으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십계명을 받습니다.
성경을 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처음 막히는 부분이 여기입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시내 광야에 도착해서 십계명, 율법, 장막에 대한 이야기가 열거됩니다. 아주 재미없습니다. 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지 그리고 뭘 그렇게 하라고 하는 말을 많은지 아주 재미없는 부분입니다.
 
재미는 없지만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언약을 맺는 이 부분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들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크게 3가지를 19장에서 약속을 하십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말씀에 복종하면 어떤 나라보다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보배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5절). 물론 이는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의 역할을 감당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이방 나라들 사이에 중보자로 서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에 따라 구분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이방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입니다. 하지만 이 언약은 우리에게도 연결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로 인해 내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아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가 하찮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모르지만 구원받은 자라면 율법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거지에게 왕자로서 지켜야 할 예절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지는 편하게 손으로 먹어도 되고 더러운 옷을 입어도 됩니다. 아무 데서나 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다릅니다. 이제 왕자가 됐기 때문에 지켜야 할 것이 많습니다.
지금은 귀찮은 것도 많지만 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야만 합니다.
왜? 왜 해야만 합니까? 한 마디로 그가 왕자이기 때문입니다. 왕자니까 해야 합니다.
 
율법들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규례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노예로 마구잡이로 살 때는 필요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지켜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켜야 할 것들 중에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동해보복법’ 혹은 ‘동해복수법’이라고 합니다. 즉 보복을 하거나 복수를 할 때에 똑같은 피해를 입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쉽게 생각하여 ““오른손으로 범죄 하면 오른손을 제거하고 눈으로 범죄 하면 눈을 제거해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교회 승합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길이 막혀서 잠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도 쪽이 시끄러워서 보니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승합차가 높은 관계로 다른 사람들 보다는 좀 자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아주머니와 중학생 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이 있었고 젊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싸우는지는 모르지만 아주머니와 젊은 여자가 큰 소리를 내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말로만 싸우던 상황에서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아주머니의 아들이 자기 엄마와 싸우는 그 젊은 여자를 냅다 내팽개치는 것이었습니다.
큰 소리로 싸워서 목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젊은 여자는 소리치면서 이게 어디서 치냐고 소리쳤고 그 아들은 또한 맞상대해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시작했는가 하면 이때 아들이 소리친 말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한 말은 이것입니다. “너도 니 엄마가 젊은 년에게 욕먹으면 가만히 있어?”라는 것입니다.
젊은 여자가 아주머니에게 욕을 했고 그 욕을 들은 아들은 가만히 있다가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상황에서 그 아들에게 ‘동해보복법’을 설명해 주고 그대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요? “저 여자가 네 엄마에게 욕을 했으니까 너도 욕만 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에 어머니가 이웃집 여자와 싸웠는데 이웃집 여자가 엄마를 밀어서 넘어뜨렸고 넘어지면서 팔이 부러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팔이 부러진 어머니의 아들이나 식구들이 이웃집에 가서 그 여자 팔만 부러뜨릴 수 있을까요?
 
성경말씀에 있는 것으로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오늘 잉태한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이 싸움 중에 낙태를 하게 됩니다.
그 남편이 어떻게 할까요? 아마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장 부엌으로 달려갈 겁니다. 무기를 들고 당장 쫓아갈 겁니다. 분을 못 참고 소리를 지르며 이성을 잃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동해보복법’은 그저 ‘눈엔 눈으로 하라’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보복하고 복수하라는 법이 아니라 처벌의 한계를 그어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받고 죽이고 싶더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이 지금 그 수준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거지가 왕자가 되었다고 당장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지가 왕자가 되었다면 손으로 밥을 먹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자의 수준을 알아야 하고 왕자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수준보다 훨씬 높습니다. 아주 높은 수준입니다.
 
룻이라는 여인을 아시죠?
룻이라는 여인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떨어진 보리를 줍는 것이었습니다. 그 떨어진 보리가 없었다면 룻과 나오미는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떨어진 보리를 주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성경말씀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 9, 1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성경에서는 밀, 보리를 추수할 때에 떨어진 것이나 모퉁이에 있는 것을 다 베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난한 사람 즉 고아나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위해 남겨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떨어진 이삭이나 구석까지 깔끔하게 다 추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믿는 사람은 이웃을 생각해서 놔두어야 하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수준보다 높아야 합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성경말씀은 많이 있습니다. 한 군데만 더 보겠습니다.
신명기 22장을 볼까요.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6절로 넘어갑니다..
6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이 본문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우리가 신경 쓰지 못하는 것들, 아니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들, 이런 것들을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법으로 정해져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수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수준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끔은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 같지만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눈엔 눈” 이 말이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어머니께서 어디서 싸우다가 한쪽 눈에 멍이 들어오셨을 때 어머니를 때린 그 사람에게 가서 똑같은 눈에 멍만 들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을 요구합니다.
할 수 없는 그것을 요구하는 그 말속에는 도리어 보복, 복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거지가 아니라 왕자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도 따르고 해야 할 것들도 더욱 많은 것입니다.
귀찮다면 다시 거지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게 싫다면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합리화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어느 정도 봉사하면서 만족할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 가정, 학교, 직장에서 동일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교회 친구, 세상 친구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거지가 아닌 왕자로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말입니다.
 
“눈엔 눈” 이것은 “보복해라, 복수해라”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넌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다”라는 이 말은 이웃을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 감정이 이끄는 데로만 행동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의지를 가지고 이웃을 이런 수준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보다 못한 수준으로 살려고 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술, 담배에 대한 언급을 성경에서 찾으며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금연, 금주를 외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금주와 금연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세상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이웃을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수준으로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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