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한 세 번째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앞에 두 번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전거 타는 법과 수영하는 법에 대해 아무리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물 위를 걷는 방법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물 위로 한 발을 딛고 그 발이 물속에 빠지기 전에 다른 발을 빠르게 물 위에 딛고 또 그 발이 빠지기 전에 다른 발을 계속해서 디디면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물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는 이론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에 두 시간 동안 우리는 믿음의 이론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믿음을 적용하는 실제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믿음의 실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 수영하는 것처럼 해봐야 압니다. 자전거에 올라탈 때에 넘어질 것이 두렵고, 수영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려고 하지만 망설이며 뛰어들지 못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아는 믿음을 실제로 적용하려고 하면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필요합니다. ‘직접 해보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주어지는 숙제입니다.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께 항복했기에 이제 우리는 ‘실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실제를 다른 말로 ‘믿음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성도들에게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믿음 생활에 대해 여러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믿음 = 생활’이라고 답변을 많이 해줍니다.
믿음은 주일에 내가 얼마나 열심과 성실함을 보이느냐가 아니라 주일에 받은 은혜로 한 주간을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알고 항복한 것이 바로 이제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주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제외한 더 많은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주일 하루만 어떻게든 견디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일에도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일에 교회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뿌듯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일에 교회 가면 모두 다 빛과 소금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진짜 빛과 소금은 그 빛과 소금이 필요한 곳에서 그 역량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에서의 믿음이 우리의 갈등을 유발하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알고 항복해서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에 고개를 끄떡이지만 실제로 순종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 일을 너무나 쉽게 처리하는 한 여인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인을 통해 우리의 실제적인 믿음 생활을 점검해 보려 합니다.
* 본문 : 사사기 4장 17~24절
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20 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사사기는 내용이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읽으면서 결코 기분 좋게 읽히는 말씀은 아닙니다.
죄를 반복해서 짓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오고 그 죄악 된 모습이 사사기 후반에 가면 엽기적인 모습으로까지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사들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구할 때는 통쾌하고 신나기도 하지만 사사가 죽은 후에 또 범죄 하는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모습에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사사기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들은 제대로 사사기 초반을 통해 보면 완벽하게 자신에게 기업으로 주어진 땅을 정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사기를 읽다가 보면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먼저 사사기 4장 1, 2절을 보겠습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이스라엘의 사사 에훗이 등장하고 이스라엘은 잠시 안정이 되는 듯했지만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목전에 또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군대 장관이 바로 시스라라는 사람입니다.
옷니엘이 등장할 때는 8년 동안 이스라엘이 구산 리사다임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다음 사사 에훗이 등장할 때는 1818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고 이번에는 장장 20년을 이방인들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사사기 4장 3절을 보면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년, 18년 그리고 이제는 20년입니다. 참 간사한 것이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힘들고 아파하지만 금방 익숙해지고 무뎌집니다.
철 병거 900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서운 무기로 그들은 철 병거를 보기만 해도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전쟁에 있어서 무기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당시 철 병거는 아주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철 병거는 사사기 1장 19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유다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거민들이 있었는데, 그 거민들에게 철 병거가 있기 때문에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철 병거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처럼 막강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은 ‘심한 학대’를 받습니다. 여기서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비틀어 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철 병거를 소유한 적을 물리쳐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상상 이상의 아주 강력한 사사를 보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보다는 거인이나 또는 영웅이라고 일컬을 만한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 정도 되어야 철 병거를 무찌르고 이스라엘도 구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때에 등장하는 사사가 바로 드보라입니다. 앞부분에서 다른 때보다 더 힘든 상황, 철 병거까지 이야기하고서는 이것을 해결할 영웅으로 보내진 사람이 바로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여성보다는 남성의 역할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여성에 대한 그 당시의 인식은 전쟁과는 상관이 없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이 어려운 사태를 해결할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4장 4절을 보면 ‘그때에’라고 시작합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드보라가 먼저 등장하면서 우리 성경과 단어의 배열이 다릅니다. 원문을 순서대로 이야기하면 ‘드보라는 여자, 여선지자, 랍비돗의 아내 그때에 이스라엘을 사사로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여자, 여선지자, 아내’라는 말을 사용하여 여자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어려운 시기인 그때에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왜 드보라가 여성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잠시 뒤에 등장하는 야엘이 또한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야기를 좀 더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인 드보라는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바락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니 명령을 전합니다.
사사기 4장 6, 7절입니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하지만 바락은 철 병거 900승을 가진 시스라에게 감히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 무서움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용을 미리 알고 있기에 바락을 비난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철 병거 900승을 가지 시스라에게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사기 5장 6절에 보면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야빈의 통치에 두려워하여 큰길로 다니지 못하고 숨어서 다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강력한 군대와 싸우러 가라는 말에 주저하는 바락의 모습이 이해는 갑니다.
결국 바락은 드보라에게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4:7)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선 바락에게 시스라를 붙이신다고 하셨지만 바락은 ‘발악’하면서 가장 중요한 영광을 얻지 못합니다. 그가 이러한 모습을 보인 것은 철 병거라는 강력한 무기와 야빈의 강력한 통치에 스스로 나약해져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철 병거의 위력은 아주 대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든 당장 눈에 보이는 철 병거가 내게는 더 큰 두려움으로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바락에게 있어 철 병거와 가나안왕 야빈과 군대장관 시스라는 너무나 큰 산이었습니다. 그동안 스스로 나약해진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나약해지고 두려움에 떨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이런 바락의 모습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께 항복하고 뜻대로 살려고 결단도 했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거대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발악’하는 바락에게 드보라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겠다 하지만 이제 가는 일로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여인이 바로 야엘입니다.
만약에 시스라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큰 소리로 웃었을 것입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내 거 니 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락에게 철 병거와 가나안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드보라에게는 아니었습니다. 마치 갈렙이 ‘그들은 내 밥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냥 그렇게 생각만 하느냐 아니면 정말 그렇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쟁에서 대승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하신 대로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스라의 철 병거를 쓸모없게 만드십니다.
4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온 군대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또 시스라는 왜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갔을까요?
5장 20, 21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하나님께서는 비와 번개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이 싸우는 장소인 기손 강은 평상시에는 물이 흐르지 않지만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나고 질퍽해지는 땅입니다. 결국 이러한 땅에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철 병거는 아무 쓸모가 없는 무기가 됩니다. 도리어 전쟁에 거추장스러운 무기로 전락해 버립니다.
결국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서 도보로 도망하게 됩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였을 것입니다. 바락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 병거와 시스라를 두려워했지만 결국 철 병거는 쓸모없는 무기가 되었고 너무나 두려웠던 군대장관인 시스라는 전쟁에서 패하고 홀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가장 고생하고 수고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락입니다. 바락은 시스라의 군대와 직접 싸웁니다. 철 병거가 꼼짝 못 할 정도의 비를 맞으면서 시스라를 맞이한 사람이고, 그 질퍽거리는 땅에서 뛰어다니며 시스라를 쫓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갯벌에서 뛰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무척 힘이 듭니다. 숨이 턱턱 막힙니다. 아마도 이 당시 상황이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바락은 숨을 헐떡거리며 시스라를 쫓았지만 놓치고 맙니다. 결국 시스라의 목은 바락에게 쥐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드보라의 이야기처럼 바로 야엘이라는 여인에게 돌아갑니다. 가장 수고한 바락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영광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시스라는 야엘의 장막에 피신을 가게 됩니다. 그는 야엘에게 엉긴 젖을 얻어먹고 보초를 서 달라고 명령한 뒤 깊이 잠이 들어버립니다.
4장 21절입니다.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당시 장막 말뚝은 여인들이 장막을 칠 때에 쓴 익숙한 도구였습니다. 평상시 익숙한 그것을 가지고 야엘은 시스라를 엽기적으로 살해합니다. 말뚝은 머리를 관통하고 땅에 박힙니다.
그리고 시스라를 열심히 찾은 바락은 이러한 엽기적인 모습으로 죽은 시스라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강력한 ‘철 병거’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던 시스라가 무기 같지 않은 무기인 ‘장막 말뚝’으로 인해 죽임을 당합니다. 장막 말뚝! 이 장막 말뚝을 가진 야엘이라는 한 여인이 철 병거 900승을 거느린 군대장관 시스라를 이깁니다.
‘우연히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에 절대로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히 있다면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보시면서 ‘아 이건 내가 알지 못했던 일이네? 이런 우연히…’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철 병거 900승과 시스라가 두려워 전쟁에 나가 영광을 얻지 못한 바락과 장막 말뚝으로 영광을 얻은 야엘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전 바락을 ‘발악’했다고 표현했지만 그를 너무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바락의 모습이 우리에게 더 친근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철 병거 900승과 시스라는 존재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이길 것이라는 믿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불안하고 불가능해 보입니다.
믿음으로 세상과 구별되어 빛과 소금으로 살며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직장에서 학교의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는 철 병거 900승과 시스라를 이겨야 하는 바락의 전쟁보다 더욱 치열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전쟁에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충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전쟁하며 충돌할 때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철 병거’에 ‘장막 말뚝’으로 대적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믿음’이 ‘진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진짜로 알고 그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장막 말뚝으로 철 병거에 맞서라고 해도 ‘네’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하나님을 더욱더 알게 할 것입니다. 두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전쟁을 한다면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분의 이메일 아이디가 ‘예하리’입니다. 현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아니요’를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분은 스스로 세뇌시키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항상 ‘예 하리’라고 자신을 향해 결심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살펴본 철 병거 대 장막 말뚝! 이 전쟁이 결국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무대임을 기억하며 승리의 조건이 더 강한 무기가 아닌 장막 말뚝을 들고 '네'하는 순종에 있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항복했기에 이제 나의 경험과 판단에 앞서서 하나님의 명령에 ‘예’하는 믿음으로 우리는 성장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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