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가장 민감한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바로 “자녀 사랑”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부모님의 자녀 사랑은 세계에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저출산으로 인해 더욱 자녀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졌습니다.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업은 망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자녀에 대한 투자와 사랑 그리고 열정은 대단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성도님들에게 하나님 다음이 바로 자녀가 아닐까 합니다.
종종 하나님보다 자녀를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만큼 많은 것들을 자녀에게 주지만 그것이 결코 옳고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친 부모의 사랑이 자녀를 망치기도 합니다. '사랑'도 옳고 그른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너무나 아름답고,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헌신적인 사랑이 무조건 옳지 않습니다.
무조건 용납하고 용서하고 받아주는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지만 꼭 우리가 짚고 넘어갈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함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성경을 기준 삼는 것에 자녀 사랑이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자녀 사랑에 대해, 가정에 대해 성경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 본문 : 사사기 17장 1~6절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한 신문에서 2024년 출산율을 ‘0.68명’으로 2023년 0.72명에서 더 떨어질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다자녀가구 기준도 자녀 3명에서 2명으로 바뀌었습니다.
평균 가구 인원도 3명 이하로 떨어진 지가 오래입니다. 2인 이하 '핵 가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가정의 역할은 더 커져야만 합니다.
자녀들에게 학교나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식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성교육이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성교육의 가장 중요한 곳인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가정을 통해 올바른 자녀가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가정은 올바른 가정보다는 역기능적 가정 즉 옳지 못한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역기능적 가정이라는 말은 가족구성원 간의 건강한 의사소통과 감정교류가 일어나지 않는 가정을 뜻하는 용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역기능적 가정은 신앙이 자녀에게 연결되지 않는 가정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기능적 가정입니까? 아니면 역기능적 가정입니까?
오늘 성경에서 나오는 역기능적 가정을 하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미가’라 하는 사람의 가정입니다.
사사기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한 이야기입니다.
사사들이 등장하다가 사사기의 뒷부분의 두 가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고 두 번째 이야기가 열두 토막 살인사건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 다 사사시대가 얼마나 암울했던 범죄가 가득한 사회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미가’라는 가정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더니’
‘미가’라는 사람의 이름은 원문으로 ‘미카예후’라고 합니다. 이는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는 의미입니다.
즉 “여호와 같은 분은 이 세상에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가 가장 높으시고 그분이 전부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름은 아주 큰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이름에 의미를 담고 그 아이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부모는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살기를 늘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절에 등장합니다. 2절입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그 가정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미가의 어미가 은 천백을 잃어버린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미가의 어머니가 저주했다는 것을 보면 그냥 분실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훔쳐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은 천백은 엄청난 돈입니다. 이 액수는 삼손의 이야기에서 블레셋 방백이 삼손에게 건 현상금의 액수와 동일합니다.
사사기 16장 5절을 보죠.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이 내용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미가의 어미가 바로 들릴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연결이긴 하지만 근거는 아주 희박합니다.
이 돈이 얼마나 큰돈인가 하는 것은 사사기 17장 10절을 보면 또 알 수 있습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돼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미가가 제사장 한 사람을 고용하려고 하는데 그 연봉이 얼마인가 하면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입니다. 이대로 계산하면 제사장이 은 천백을 모으려면 110년간 모아야 한다는 계산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미가의 어미가 도둑맞은 것입니다.
미가의 어미가 이 돈을 잃어버렸을 때 하늘이 노래졌을 것입니다.
현대로 따지면 보증 잘못 섰다가 온 집이 날아가고 순식간에 거리에 나앉게 되는 심정일 것입니다.
이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릅니다. 미가의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미가의 어미에게 그 돈은 생명과 같은 돈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가는 조금 전에 잠시 살펴보았지만 제사장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은 미가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 같이 되었다고 사사기 17장 11절에서는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가는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도 많았을 것입니다.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모든 재산은 그의 어머니에게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를 통해 미가의 어미는 돈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돈을 잃어버렸을 때에 하는 행동을 통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심증을 더욱 주게 합니다.
그녀는 은 천백을 잃어버리자 저주를 합니다. 찾아도 찾아도 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당시 수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잠시 숨어있을 만한 크기도 아닌데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저주를 합니다.
저주도 우리가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욕이나 저주를 보면 육체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빌어먹을, 능지처참, 지랄”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외국 욕을 보면 좀 다릅니다.
교회에서는 금지된 용어지만 미국 욕 중에서 ‘Go to hell!’, ‘God Damn’ 같은 것을 아실 겁니다.
그냥 우리는 보통 ‘빌어먹을’이라고 번역하지만 이 의미를 보면 무섭습니다.
그 의미는 ‘지옥에나 가라’, ‘God Damn’은 지옥에 갈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옥에서 살아’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용어를 쓰면 안 됩니다.
영적인 의미가 담긴 욕입니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문화적인 면을 보면 아마도 미가의 어미의 저주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육체적인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영적인 부분에서의 저주도 담았을 것입니다.
그 저주의 내용은 너무나 무섭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말로 추측됩니다.
이 저주를 들은 아들이 실토를 할 정도로 아주 무서운 저주입니다.
어머니의 돈을 훔칠 정도로 담대한 아들이 저주를 듣고 실토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미의 저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하십니까?
그 정도의 큰돈을 도둑맞았다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아들도 열심히 돈을 찾고 함께 그 어미와 고민하는 시늉도 했는지 모릅니다.
즉 버티고 버티고 얼굴에 철판 깔고 ‘나는 아니야’하는 표정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대단한 사람은 미가의 어미입니다.
보통 내뱉을 수 없는 저주를 말함으로 겁먹은 아들이 실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여인입니다.
문제는 그 저주의 대상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다시 2절입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는 돈을 훔쳐갔고 결코 돈을 다시 내놓을 생각도 없었는데 그 어미의 대단한 저주로 인해 실토합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은 미가의 어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뭘 잘했다고 복 받기를 원할까요? 정직하게 돈을 돌려줘서요?
저주를 한 그 여인은 그 저주를 상쇄하기 위해서 다시 복 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저주를 취소하거나 혹은 말이 씨가 되면 안 되기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작 미가는 복 받을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복 받기는커녕 두들겨 맞아야죠. 복보다는 저주가 임해야 사실 정상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도 이러한 모습은 참으로 많이 보입니다.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도 자신의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일성수도 제대로 못하고, 성경도 읽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무엇이 있는 지도 모르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는 자신의 자녀를 야단치고 혼내기보다는 그저 복 받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 미가의 어미와 똑같습니다.
자녀는 대학교 가기 위해 학원에 열심히 다니고 교회 활동도 멈추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그 부모가 교회에 나와서 자신의 자녀가 복 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미가의 어미와 똑같다는 말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도 내 자녀가 제대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려움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무서운 말이지만 이렇게 되는 것이 맞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대학교 가고 좋은 직장 가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죽음 후에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에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길게 살아야 120년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영원이 중요합니까?
미가의 어미는 당장 자신의 아들인 미가가 잘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나중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험한 말로 한 그 저주가 아들에게 임하지 않기만을 원합니다.
그것이 도리어 자신의 아들인 미가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말입니다.
미가는 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 했을까요?
3절, 4절을 보겠습니다.
3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미가의 어미와의 대화를 통해 상상해 보건대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미가의 어미는 미가에게 왜 그 돈이 필요했는가를 물었을 것 같고 미가도 그에 대해서 적절한 답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대화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미가는 그 돈으로 신상도 만들고 에봇, 드라빔도 만들고 신당에 그것들을 놓고 복이 오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즉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기 위해서 그 돈을 훔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미가 아들의 말에 ‘그러냐? 마침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럼 그냥 그렇게 해라’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미는 돈을 미가에게 주고 미가는 여전히 저주가 무서운지 다시 그 돈을 어머니에게 줍니다.
어쩔 수 없이 미가의 어미는 스스로 돈 이백을 들여 한 신상을 만듭니다.
미가의 어미를 보면 돈에 대한 애착도 심해 보이고 저주의 말도 아주 유창하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사용하면서 아들에 대한 애정도 그에 못지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을 위해서 한 신상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호와께 이 은을 드린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신상을 만듭니다. 은장색을 불러 신상을 새기고 부어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미가의 어미가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막 나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7장 25절을 보죠.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리고 여호와께 복을 받길 원하지만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는 것을 합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아들에게 시키는 것입니다. 아니 아들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려고 하다가 못하니까 그의 어미가 대신해 줍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영적으로 전혀 도움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범죄를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더 부추겨 주는 꼴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그 일을 미가의 어미는 미가를 위해서 합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클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것은 아들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5, 6절입니다.
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미가에게 신당 즉 신의 집, 신들의 집이 있어서 에봇과 드라빔까지 만들고 한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는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마무리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여기가 아닙니다. 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뒤의 이야기는 미가가 지나가는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삼고 그리고 단 지파가 그 제사장과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빼앗아 가는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미가의 행동을 보면 하고 싶은 대로, 흔히 하는 말로 막 나갑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만 골라서 합니다.
오늘 본문 뒤를 이어서 보면 미가가 정말 생각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이 미가의 행동이 누구를 꼭 닮았다는 것입니다. 닮은꼴입니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가시죠.
바로 미가와 미가의 어미는 닮은꼴입니다.
아니 닮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미가가 배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무서운 말이죠. 미가의 잘못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벌은 미가가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불쌍한 것은 미가입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를 통해 그렇게 배웠습니다.
제대로 신앙생활 안 해도 하나님께 복을 빌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내게 잘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는 세상에서 원하는 지식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 등등 그 모든 것은 미가가 그 어머니에게 배운 것입니다.
미가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가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미가의 어미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때에 왕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습니다.
하지만 미가의 어미에게는 왕이 없었고 그리고 그의 아들도 어머니를 쫓아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자는 자기 생각에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미처럼 사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어 한 단어, 수학 한 문제 보다 하나님 말씀을 먼저 알아야 하고 돈을 얼마나 더 벌고 어떤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하게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된 사람은 미가의 어미의 모습을 자신에게 비춰보시고 아직 부모가 되기 전의 사람들은 이러한 미가의 어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야만 나중에 내 자녀를 향해 온전한 신앙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역기능적 가정에서 자라셨습니까? 지금 그것을 끊어야 합니다.
내가 끊고 내 자녀는 영적으로 역기능적 가정에서 자라지 않게 해야 합니다.
가정의 소중함, 그리고 그 가정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선 무엇보다 미가의 어미 그리고 그 어미의 영향을 받은 미가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어떤 곳에서도 왕이 계심을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심을 가르치고 그리고 지금부터 생활에 옮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부모로서 미가의 어미가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녀들이 미가의 어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확실하게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나중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확실하게 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올바른 자녀 사랑!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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