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핑계(1) 철병거"(삿 1:19~21)

소리유리 2023. 12. 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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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언약의 상징 무지개... 망원동 한강고수부지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말씀, 찬양 또는 기도 등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말씀, 찬양 또는 기도 등으로 어떠한 느낌 또는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감동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감동을 받지만 감동을 받는다고 다 은혜는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 또는 집회 가운데 눈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마음 속 깊은 울림이 있고 뜨거운 회개의 기도를 드리면 그것을 무조건 은혜로 표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은혜를 받으면 눈물과 울림 그리고 기도가 나옵니다. 

하지만 반대로 눈물과 울림 그리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 반드시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 또는 회심을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은혜가 일반적인 감동과 동일시된다면 이 또한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해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은혜를 받으면 감동을 받지만 감동을 받았다고 은혜는 결코 아닙니다.

 

은혜가 정말 은혜가 되려면 그 은혜의 근거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감동만 받고 그 감동을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감동은 세상이 주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과 감동을 받은 사람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비슷한 말처럼 느낄 수 있지만 감동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통해 도움과 이익을 얻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 얻는 도움과 이익은 내가 생각하는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은 나의 한계를 깨버립니다.

​또한 감동을 받은 사람은 그 감동을 간직하고 계속 그 감동에 머물러 있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감동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의 뜻을 찾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의 지정의가 있다면 감동은 잠시 느끼는 신앙의 ‘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고 ‘지, 의’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동에서 끝나고 맙니다. 
둘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그래서 감동만 받던 사람은 어려움과 갈등 상황 속에서 핑계거리를 찾게 되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려움과 갈등 상황 속에서 그 일을 해결하실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실제로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지와 감동을 은혜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핑계를 이야기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 본문 사사기 1장 19-21절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0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우리는 성경을 의무감으로 읽을 때가 있습니다. 모임에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또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읽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책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에서 하는 드라마는 지금 마지막 회를 보더라도 맨 첫 회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지만 성경을 읽을 때는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매일 읽으면서 어제 읽은 부분이 생각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성경읽기가 반복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을 이해하고 그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오늘도 내가 읽어야 할 분량을 읽었다’라는 만족감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거나 사건의 전개를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범인과 형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누가 범인일까 하고 추측도 하고 자신이 생각한 상식에서 벗어나는 반전에 놀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추측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상상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놀라운 일을 보아도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과 이적들은 성도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온다면 아주 놀랍고 대단하고 감동적인 것들이지만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감정 없이, 본래 그런 것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먼저 상식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식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더욱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그 뜻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 역시 우리가 너무나 쉽게 넘겨버리는 성경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게다가 이 말씀은 우리의 눈길을 끌지도, 관심이 가지도 않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읽은 사람들은 한 번 슬쩍 읽고 나서 다음에 혹시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내가 읽은 말씀인지 아닌지 구분도 가지 않는 말씀일 것입니다.

 

사사기는 오늘 이 시대와 잘 비교되는 성경 말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마찬가지로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대해서 ‘엔 샬롬 교향곡’이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평강, 평안입니다.

거기에 ‘엔’이라는 말을 붙이면 부정어, 반대말이 됩니다. 평안을 누려야 할 시대에 그리고 누릴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그 땅을 분배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분배된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지파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는 12지파가 있습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레위 지파가 빠진 11지파와 요셉의 두 아들로 유래된 것입니다.

그 12지파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파 중의 하나가 바로 유다 지파입니다. 

사사기 1장 19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크게 가져야 할 의문점은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시어서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는데 왜 골짜기의 주민들은 쫓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철 병거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 병거가 무엇이기에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쫓아내지 못하였을까요?

철 병거!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여호수아 17장입니다. 17장 14절 이후로 보면 요셉 지파가 자신들의 기업이 적음으로 인해 여호수아에게 나아가 따집니다.

여호수아는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살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요셉 자손들은 그 땅에 철 병거가 있어서 어렵다고 말을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400여 년을 노예로 살았고 전쟁에 능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철 병거라는 적의 병기는 아주 놀랍고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겁을 먹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철 병거가 사사기에서도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의 강력한 유다 지파가 철 병거 때문에 완벽한 정복에 실패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끄떡여집니다. 완벽한 정복을 하지 못한 이유가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아하 그랬구나’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좀 더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이스라엘이 점령하려는 그 땅이 어떠한 땅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 땅의 시작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3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본문을 기억해야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가나안이라는 땅이 어떠한 땅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 할 부분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금 떠나게 하시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케 하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를 복으로 또는 복의 근원으로 만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오랫동안 스스로 계획하여 이루려는 의지로 보이지 않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생각하기에 ‘소문을 들어보니까 가나안 땅이 좋다고 하는데 지금이라도 내가 거기 가서 살 계획을 세우고 가나안 땅으로 가야겠다!’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가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아브라함은 전혀 계획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서 하시고자 하는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그리고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떠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출애굽기 19장 6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은 가나안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보다 더 큰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집어넣으시려는 의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방인들과 싸우는 전쟁의 주도권은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이방인들과 싸우는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도구로 그분의 계획과 목적에 얼마나 잘 순종하느냐에 있지 뛰어난 무기와 전략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반복한다면 이스라엘이 좋아서 들어가려는 땅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집어넣는 땅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그리고 이 정복전쟁은 바로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기가 없어도 여리고 성을 13바퀴만 돌고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반복해서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을 제대로 보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하나님께 전쟁의 주도권이 있고 이스라엘에게 무기나 전략이 없어도, 이겨야 할 전쟁을 적에게 철 병거가 있어서 정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복을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패하셨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싸움,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철 병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집어넣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는 싸움에서 철 병거 때문에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요?

 

이 의문점을 마음에 두고 철 병거가 등장하는 다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자 사사가 있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드보라입니다. 그녀와 싸우는 적이 바로 철 병거 900승을 거느린 가나안왕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입니다.

아주 무서운 철 병거가 또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는 대로가 비었고 사람들이 오솔길로 다녔다고 이야기할 만큼 이스라엘은 그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주 의외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 강력한 군대가 이스라엘에게 패합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박살납니다.

철 병거를 거느린 군대는 완벽하게 유린당하고 그 강력한 철 병거를 이끌던 군대장관 시스라는 개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시스라는 살해당하는데 아주 엽기적으로 당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사기 5장 25, 26절입니다.
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누군가가 엉긴 우유를 주어 푹 잠들게 하고 장막 말뚝을 관자놀이에 대고 머리를 뚫어버립니다. 성경 원문을 보면 말뚝이 머리를 뚫고 땅에 박힐 정도로 잔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야엘이라는 한 여인입니다. 전쟁에 능하지도 않고 무기를 잘 다루지도 않고 새로운 무기를 쓰지도 않는 평범한 여인입니다.

아마도 이 사건이 있지 않았다면 성경에 이름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철 병거 때문에 이스라엘 지파 중에 가장 강력한 유다 지파가 온전히 점령하지 못했는데 사사기 4장에서 등장하는 여자 사사 드보라와 한 여인 야엘은 철 병거 900승을 무찌르고 그 군대장관을 엽기적으로 그리고 아주 손쉽게 죽여 버립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철 병거는 무엇인가?
전 이렇게 단언합니다.
이 철 병거가 바로 오늘 제목인 핑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철 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의지로 들어가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로 들어가는 땅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곳에서 핑계를 대고 싸우지 않습니다. 아주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이 핑계는 듣기에 아주 그럴듯하고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누구나 들어도 수긍할 수 있는 핑계입니다.

그리고 철 병거 핑계를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잘 사용합니다. ​진정한 은혜가 없이 감동만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환경과 상황이 바뀔 때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핑계가 있습니다.
그 핑계는 철 병거처럼 모두가 다 이해해 줄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지만 그 핑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어이없어 하실 것입니다.

이런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의 가장 큰 문제는 학교를 매번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참다못해 꾸짖자 그 학생이 변명을 했습니다.
  ‘사실 아침마다 남학생이 자꾸 쫓아와요’
  ‘남학생이 쫓아오는데 왜 지각을 해?’
  ‘쫓아오긴 하는데 너무 늦게 쫓아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핑계는 남학생이 너무 늦게 쫓아와서 지각한다는 그 여학생의 말과 똑같습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핑계가 더 어이가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철 병거가 있어서 이기지 못하셨다는 이상한 핑계를 지금 내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 17장 18절 말씀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나는 핑계를 당당하게 하나님께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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