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요 '나'의 신앙과 생활"(욘 4:9~11)

소리유리 2023. 12. 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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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읽기 힘든 부분이 소선지서입니다.

호세아로 시작하는 12권의 소선지서는 이름도 낯설게 느껴지는 책들이 많습니다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친숙한 소선지서가 요나서입니다. 이야기가 재밌고 극적입니다.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의 이야기는 머리에 그려질 정도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마디로 대충 내용을 다 아는 성경입니다.

 

요나의 이름은 너무나 유명해서 영어사전에 찾아보면 나옵니다.

첫 번째는 구약의 선지자, 두 번째는 불행, 재앙을 가져오는 사람. 불행과 재앙을 가져오는 사람의 대표격으로 되어 있는 요나입니다.

요나서는 쉽다는 생각을 가지는 성경이지만 사실 어려운 책입니다. 어렵다는 말은 내용을 그냥 읽을 때는 좋지만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하고 해석하기에 어렵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책을 고르라면 레위기, 욥기, 전도서, 아가서 등이 있습니다. 레위기는 율법, 제사 등의 이야기가 어렵게 느껴지고, 고난을 다룬 욥의 이야기도 해석하기 어렵고, 허무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전도사, 이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다루는 아가서...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말한 성경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요나서가 어렵다는 말은 좀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너무나 이야기가 쉽고 극적이고 재밌기 때문에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성경 중에 하나입니다.

이상해야 할 것, ?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너무 생각하지 않고 보는 잘못된 습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그 이상한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나의 이상한 점... 그중에서도 요나가 보여주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는 요나, 2장에서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3장에서는 선지자로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4장에서는 회개한 니느웨 백성 때문에 분노하는 요나입니다.

뭔가 장마다 요나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불순종, 회개, 말씀선포, 분노... 요나의 별명을 ‘그러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러나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에서 요나의 반응에 그러나가 많이 등장합니다. 계속 반전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요나의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2장에서 하나님께 회개했는데 왜? 4장의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회개했는데 하나님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내가 옳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요나입니다.

 

요나서를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상한 요나의 신앙과 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흔희 요나 이야기는 동화처럼 다루어지기도 합니다. 실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고기 뱃속에서 72시간 있는 이야기, 니느웨 성 전체가 회개하는 극적인 이야기, 박넝쿨이 하루 만에 자라고 시들어버리는 이야기 등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요나의 이야기를 신약에서 말씀하시기에 요나서에 기록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왕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입니다.

이야기의 시작 1장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2절입니다.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니느웨가 등장합니다. 니느웨는 당시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800km 떨어진 곳으로 한 달 정도 걸리는 곳입니다. 서울 남산타워에서 부산 중심부 시민공원까지 직선거리로 320km, 중부내륙 고속도로 410km... 이 정도 거리입니다. 그냥 쉽게 멀어서 가기 싫다라고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앗수르는 대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원수나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는 다메섹 즉 아람이었지만 앗수르의 공격으로 약해졌었고 또한 앗수르는 북방 아라랏의 공격으로 약화되어 당장 이스라엘을 쳐올 힘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힘이 회복되면 이스라엘을 공격할 나라였습니다.

 

앗수르가 싫고 그 수도인 니느웨는 더 싫습니다. 그런데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요나의 입장, 나라를 사랑하는 요나에게 잘된거죠. 문제는 망해야 속시원한 나라인 앗수르 그 수도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는 것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결정적으로 요나가 가기 싫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는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나중에 이 부분을 다룰 것이고 당장 요나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반응이 13절에서 나옵니다.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러나의 요나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갑니다. 다시스는 니느웨에서 가장 멀리 도망갈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동쪽 니느웨에서 서쪽 다시스로.. 선지자인 요나...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 하는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가고 있습니다. 시편 139편 말씀을 보죠.

 

시편 1397~10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주의 영을 떠나서 어디로 피할 수 있을까? 하늘에도 스올에도 바다 끝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아는데 요나는? 더 잘 알죠.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정말로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아주 많이, 굉장히...

도망가는 선지자 요나... 그러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나쁜 놈을 봤나 하고 포기하실 것 같은데 하나님은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십니다. 배가 거의 깨어질 정도가 됩니다. 선원들이 각기 자기 신을 부를 정도의 대풍입니다. 그들에게 소중한 물건들을 바다에 던질 정도입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요나의 반응이 또 등장합니다. 5절입니다. 함께 보죠.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그러나로 반응하는 요나... 배 밑층에서 잠이 든지라...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이라는 성경이 있는데 거기서는 요나가 ‘코를 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피곤한거죠. 하나님을 피해 도망간다는 것이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 고역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코를 골고 자는 요나를 선장이 깨웁니다. 이 와중에 어떻게 자고 있냐? 너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냥 신입니다. 너의 신에게 빌라는 것이죠. 그리고 대풍이 너무 심하니까 이건 신의 노여움이다 이 원인을 알아보자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에게 뽑힙니다. 요나에게 영문을 묻습니다. 취조당하는 분위기입니다. 8절입니다.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재앙의 원인, 네 생업, 출신, 나라, 민족... 여기서 생업은 보냄을 받는다는 말로 봉사하다라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선지자 직분으로 봉사하는 요나는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당당하게 나는 히브리 사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뻔뻔하죠. 경외한다면서 지금 선지자인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 싫어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요나를 책망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냐? 네가 한 이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선장과 선원은 점점 흉용해지는 바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나 때문에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서 요나의 희생정신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요나의 희생정신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냥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이 모습은 바다에 빠져 죽을 지라도 나는 니느웨가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이방인 특히 앗수르.. 니느웨 사람들은 너무나 싫다.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악독한 백성들이다... 지금 요나는 그들과 똑같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방인 선장과 선원은 어떻게든지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합니다. 당장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거칠어지니까 어쩔수 없이 바다에 던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는 내용이 1장입니다.

 

1장을 너무 길게 말씀드렸는데 요나라는 사람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본문이기에 말씀을 길게... 선지자 요나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가 너무나 싫어하는 이방인들, 선장과 선원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선지자가 왜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가?

 

오늘 설교제목을 요 나의 신앙과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요와 나를 한 칸 띄어달라고 특별히 부탁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요나와 나를 신앙과 생활을 비교하면서 봐야 합니다.

 

117절부터 상황이 반전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3일 밤낮 72시간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2장은 요나의 기도, 찬양, 회개라고 합니다. 요나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도하며 멋진 말들을 합니다. 9절입니다.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는 선지자 요나! 대풍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한 요나...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미리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그를 살려주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드리고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말하며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명해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

 

3장으로 가서 요나에게 하나님은 1장과 똑같은 사명을 주시죠. 이번에 요나는 그러나의 반응이 아닐 말씀대로 니느웨로 갑니다. 그리고 가서 외칩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에 대한 반응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4절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로 끝납니다. 바로 5절에서 하나님을 미독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 즉 큰 슬픔을 표현하는 옷을 입습니다.

왕에게 들리니까 왕도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습니다. 재에 앉는 것은 심히 낮아지는 것, 회개와 겸손, 슬픔의 표현입니다.

또한 왕은 조서를 내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베옷을 입고 기도하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우리를 멸망하지 않게 하실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기원전 763~769년 사이에 무서운 전염병, 완전한 일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더욱 회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악독한 앗수르... 그 수도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누가복음 157절을 볼까요.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놀라운 일이고 은혜로운 일.. 4장에 가보면 니느웨 사람들은 12만명으로 이야기합니다. 정말 놀라운 회개, 부흥운동입니다. 하늘에서 잔치 잔치가 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의 별명을 가진 요나는 어떨까요? 4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4장 1절은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우리에게 생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기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나... 선지자로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2장에서 뿌리에까지 내려가서 회개하고 이제 순종하고 니느웨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1장에서 니느웨 가기 싫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욥바로 내려간 요나와 4장 1절의 요나로 이어지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2장의 요나의 기도, 노래가 있었는데 매우 싫어하고 성내는 요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요나의 2장에서의 회개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2장의 요나는 진심일까? 거짓일까?

회개의 진심과 거짓... 전 둘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요나는 진심입니다. 불순종하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을까요?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와 감사가 나를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전 요나의 기도를 자기중심적 회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진심이 아니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회개, 깨달음은 자기중심적입니다.

2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일로 기뻐하는 반면 4장에서는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구원은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자신이 적으로 간주하는 이들의 구원은 원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요나... 하지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 편이 되어야 하는 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3장에서 니느웨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전하러 가지만 내가 전할 때 어떠한 반응이 올 것을 기대했을까요?

3장에서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에 매우 싫어하고 노한 요나... 그 반대를 기대했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즉 요나가 이야기해도 회개하지 않고 더 악독을 행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44, 5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의 질문... 성내는 것이 옳으냐는 말씀에 대답도 안하고 요나는 성읍 동쪽에 앉아 초막을 짓고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앉아있습니다. 뭘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죠. 니느웨 사람들이 잠시 회개하지만 다시 악독을 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죠? 지금 이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신앙, 믿음과 보여지는 생활이 전혀 다릅니다.

 

첫부분에 요나가 왜 그렇게 니느웨이 가기 싫어할까?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42절입니다.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선지자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았고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을까 해서 가서 전하기 싫어했고 도망갔습니다.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고 그 구원이 내게 임했을 때에 기뻐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은혜가 적에게, 내가 못마땅한 사람에게 임하면 죽을 정도로 싫은 사람이 요나.. 요! 나입니다.

 

그 가운데 박넝쿨이 등장합니다. 이 박넝쿨은 뜨거운 햇볕에서 시원한 그늘을 그에게 제공합니다. 요나는 이로 인해 크게 기뻐합니다.

요나의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보면 단순히 박넝쿨의 그늘만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그늘의 기적이야말로 하나님이 자기 편에서 자기를 도우시며 축복하신다는 하나의 증표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나의 착각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갈 때 마침 배를 만납니다. 아.. 도망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내 편을 들어주시는 구나. 말씀을 그렇게 하셔도 나를 이해해 주시는구나.

요나의 신앙과 생활...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요나... 그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생활은 이중적, 이원론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4영리 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제가 편집을... 신앙은 있습니다. 즉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내 중심의 생활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주인의 자리에 내가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다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배를 예비하신 하나님... 회개했지만 니느웨를 멸망시킬 하나님...

신앙이 있지만 생활은 여전히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 내 중심 자리를 내 놓아드리는 것이 영적싸움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 것...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적 신앙으로 가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싫어해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면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적으로 행복한 길은 하나님과 나와의 갈등에서 내가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항복하는 것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2장은 요나에게 진심의 회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는 것인데 항복하진 않고 지금 내게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할뿐이었습니다.

바다에 내린 대풍, 환난, 심판에 대한 내가 이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군데 살펴볼까요. 사사기 24, 5절입니다.

 

사사기 24, 5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보김... 울어버리고 망한.. 보김은 우는 자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말씀에 울어버리고 제사드린... 회개하고 예배드린 곳... 너무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려서 우는 자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보김...

하지만 그들은 다시 가서 범죄합니다. 신앙이 생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생활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요나... 그의 믿음, 신앙이 생활로 이어지지 않아 혼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요나서 49~11.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너무나 자상한 하나님의 타이르심입니다. 어찌 옳으냐? 너는 박넝쿨도 아꼈는데 나는 12만명에 가축도 많은데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물론 중간에 등장하는 요나가 바로 요! !입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습니다!

지금 우리의, 나의 모습은 요나와 닮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를 떼고 나의 신앙과 생활은 이제 나의 신앙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는 모습. 교회에서와 가정, 회사, 사회에서의 모습이 동일하게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정말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이라도 말입니다.

 

당장 그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를 보면 그렇습니다. 회개하지만 그 회개 조차도 내 이해 안에, 내 기준 아래, 내가 중심이 되는 자기중심적 회개...

하지만 11절 이후의 요나의 침묵은 한 번 더 성장하는 모습으로 성화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이 바로 생활이 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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