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해 할 수 없는 그 얘기로 넌 핑계를 대고 있어”
가수 김건모 씨의 ‘핑계’ 첫 소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지만 실생활에서 많이 하는 것이 바로‘핑계’입니다.
핑계는 ‘내키지 아니하는 사태를 피하거나 사실을 감추려고 방패막이가 되는 다른 일을 내세움’ 또는 ‘잘못한 일에 대하여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구차한 변명’이라고 합니다.
‘방패막이가 되는 다른 일을 내세우거나 돌려 말하는 구차한 변명’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뻔히 보이는 상대방의 핑계를 알면서도 인정해줍니다. 마치 다음에 내 핑계도 봐달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핑계를 댈까요? 좀 전에 살펴본 대로 그것이 내키지 않고, 내가 선택하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지만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핑계를 우리는 아주 자주 즐겨 사용합니다. 사람, 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핑계’를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핑계에 ‘어쩔 수 없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 ‘어쩔 수 없지’라는 말에 스스로 수긍하며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떡여질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핑계’이기 때문에 아니라는 사실은 핑계를 대고 있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스스로도 잘못이라고 알고 있는 그 핑계를 하나님께 이야기하며 하나님을 납득시키려고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한 핑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지금도 이해 할 수 없는 그 얘기로 넌 핑계를 대고 있어”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내 나름대로의 멋진 핑계로 이리 저리 빠져나가려고 하는 내게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 본문 : 출애굽기 4장 10~17절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속의 뛰어난 인물들을 보며 매력을 느끼고 좋아합니다. 특히 요셉이나 여호수아, 갈렙 같은 인물들은 매력적일뿐만 아니라 완벽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완벽하고 흠이 없는 사람보다는 도리어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성경 속의 뛰어난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실수나 조금 부족한 모습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또한 그러한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고 힘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 속의 여러 인물 중에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했는데 싫습니다! 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탑니다. 게다가 회개하고 돌아서서 하나님의 명대로 니느웨로 갔는데 그 악독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자 성질을 팍팍 내면서 ‘내가 이기나 하나님이 이기나 지켜보겠다’는 심사로 하나님께 대들며 ‘내가 죽더라도 옳습니다!’를 굳건히 외치는 사람이 바로 요나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아주 대단한 인물도 나옵니다. 사사기에서 등장하는 기드온은 ‘표징을 보여주십시오!’ 라고 요구하고, 예물을 가져와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양털 한 뭉치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게 해달라고 했다가 하나님께서 그대로 해주시니까 다음 날은 그 반대로 해보라고 하는 등 몇 번씩이나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아주 대단한 인물이죠.
그리고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한 명 또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살펴볼 모세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성경에서 하나님과 맞상대해서 하나님을 화나게 한 사람은 성경 속에서 모세가 유일합니다.
오늘 본문 4장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맞상대로 하나님께서 화를 내게 만든 대단한 모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면서 40년씩 3번에 걸쳐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 40년은 애굽의 왕자로서 그리고 다음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이자 도망자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80세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장면 가운데 나오는 말씀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출애굽기 3장 1, 2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장인의 양 무리를 치는 모세 앞에 하나님께서는 타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나타나십니다. 불꽃은 있는데 나무자체가 타지 않는 이적 가운데 모세를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이적가운데 나를 부르신다면?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를 겁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자신이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애굽에 있는 나의 백성의 고통을 들어서 이제 애굽인들의 손에서 그들을 인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이끌 것이다.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사람들에게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제 내가 너 모세를 애굽의 바로에게 보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 인도하게 내겠다! 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이 출애굽기 3장 4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11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의 대답은 아주 겸손한 듯 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합니까? 저는 아닙니다. 저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11절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내용을 보면 모세가 겸손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거절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이 대답은 이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됩니다.
출애굽기 2장 14절입니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모세가 자신의 형제들 즉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인에게 맞는 것을 보자 그 애굽인을 죽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신의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보니까 서로 싸웁니다. 모세가 한 마디 하자 그들의 대답이 바로 14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의 앞부분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니가 뭔데?’ 즉 ‘네가 누구관대’입니다. 자신의 형제 즉 이스라엘을 힘써서 도왔는데 들은 소리가 바로 ‘네가 누구관대’였습니다.
모세가 무슨 생각으로 ‘내가 누구관대’를 말했는지 성경에 나와있지 않지만 추측은 해볼 수 있습니다.
복잡한 사연 있는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갑니까?’라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2절로 답변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함께 해 주신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가 또 묻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은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친절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3장 15절에서 22절을 보면, 하시고자 하는 계획의 과정과 앞으로 어떻게 될 것까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십니다. 자세하게 읽어보면, ‘이렇게까지 친절하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설명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모세의 답변은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또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팡이로 뱀을 만드시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시고 다시 정상으로 만들어 주시고 물이 피로 변하는 기적을 보여주시며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친절함에 4장 10절로 대답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은 11절로 응답하시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번 답변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고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칠 것이니까 이제 잔소리 말고 가라! 는 것이죠. 그런데 모세는 정말 대단합니다.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13절과 같이 또 한 번 더 거절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모세를 향하여 화를 내십니다. 그리고 모세의 형 아론을 이야기하시며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로 말씀을 마무리 지으십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답변은 없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니까 더 이상 말 못하고 구시렁구시렁 거리면서 내려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주 간단하게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모세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면서 하나님을 결국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못 믿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간다고 해도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을까봐? 모세가 너무 소심한 성격이고 내성적이어서 계속 겸손하게 거절하는 것일까요?
모세의 모습을 다른 부분에서 보면 결코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볼까요? 모세가 40세 때에 자신의 백성을 생각해서 애굽인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가 80세에 나타나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냉정해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만약 지금 나타난 하나님께서 내가 일을 벌인 40세 때에 나타나셨다면 백성들이 나를 따를 것이고 출애굽을 시킬 수 있을텐데…. 내가 도와준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리어 니가 뭔데 할 때는 조용히 계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시다니…’
모세는 120세에 죽습니다. 모세의 80세에 나타나신 하나님. 현재 나이로 생각해서 90세까지 사람이 산다고 한다면 60세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30세, 한창 혈기왕성할 때에 뭔가 하려고 했을 때는 아무 반응도 없으시다가 60세에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무나 자세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이적과 기적까지도 보여주시면서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반항하면서 하나님을 화나게 만들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알았고 금방 눈앞에서 이적과 기적을 봤음에도 모세는 왜 거절할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성경 속에서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까? 한 마디로 왜 이렇게 핑계를 대고 있을까? 진짜 모세의 심정은 무엇일까?
모세의 심정이 지금 우리들의 심정 같지 않을까요? 중요한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에 우리는 모세의 겸손 또는 그 일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며 거절하는 모세와 나를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 속은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을까요?
'싫습니다! 하기 싫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일에 대해서 모세가 하고 싶은 말은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뭔가 하려고 했을 때는 도와주지 않았고, 동족을 돕는다고 나섰다가 도망자 신세만 되었는데…. 이제 가라고 하니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싫습니다. 기왕 시키실 것이라면 40세 때에 나타나셔서 지팡이 던지면 뱀 되고, 문둥병 기적에 물을 피로 만드는 기적을 보이셨으면 백성들이 다 나를 쫒아 왔을 텐데 이제 와서 이게 뭡니까? 나이도 80세나 됐는데 됐습니다. 저 안할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보이는 모세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다가 화를 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깨갱 소리 내며 입으로는 계속 구시렁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명대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이고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전쟁, 싸움을 해야 하는데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하기 싫습니다!’를 외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앞서 언급한 김건모의 ‘핑계’처럼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핑계로 하나님을 화나게 한 대단한 인물이 모세입니다.
그 대단한 인물 모세의 후계자가 또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내가 싫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모세와 같은 모습을 많이 발견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하나님께 대면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 합니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모세의 말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네 입을 만들었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해서요, 리더십이 없어서요… 등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봐라! 들의 백합화를 봐라! 내가 다 만들었다. 시간도 내가 만들었고 일할 수 있는 능력도 만들었고, 은사도 내가 주는 것이고 능력도 내가 주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의 핑계는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내 취향에 맞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리고 해서 도움이 되고 내가 드러날 수 있는 그것을 합니다.
기준이 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드러나지 않아도, 힘이 들고 칭찬을 받지 못해도, 내가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나님께서 하라시면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여러 핑계로 헌금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외에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속을 깊숙이 살펴보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내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을 내 스스로 제일 잘 압니다.
모세의 후계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제 못하는 것 말고 다 해야 합니다. 아니 못하는 것의 기준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핑계는 더 이상 안 됩니다. 만약에 정말 못할 일을 시킨다면 시키는 자 즉 하나님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그 일을 맡겨주십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하기 싫어하는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감사한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화나게 할 만큼 핑계를 댔지만 혼나고 나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구시렁구시렁 하면서도 결국 그 길을 갔습니다. 하기 싫은 그 일! 구시렁거려도 좋습니다. 하십시오! 아니, 해야만 합니다.
주일성수 하기 싫을 때가 있더라도 하십시오!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주일성수하는 것이 즐겁고 기뻐질 것이고 헌금이 전혀 아깝지 않고 도리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기 싫으면서도 했던 나를 나중에 더 칭찬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7절을 찾아볼까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서 애굽을 떠난 모세는 출애굽하는 모세가 아닙니다. 28절에 유월절, 29절에 홍해사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애굽을 떠나는 것은 애굽사람 죽이고 도망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는 칭찬해 주십니다. 하기 싫은 그것을 했지만, 구시렁거리면서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명을 듣고 나중에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단한 모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기에 오래전의 부끄러운 순종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라는 말을 붙여서 칭찬해 주십니다.
핑계대지 말고 싫더라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정말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안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면서 정말로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도 정말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취향에 맞지 않는, 나의 성격상 맞지 않는, 나의 환경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구시렁거리더라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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