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정체성(1) 홍해"(출 14:1~4)

소리유리 2023. 12. 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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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철학자들의 주된 질문 중의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이 뛰어난 철학과 사상으로 남아있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 질문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도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발견하고 지금은 그 의미대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나요? 이러한 질문을 그저 철학적인 것으로만 여기고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어쩌다가 창조된 사람이 아니라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기에 이 정체성의 문제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대하여 지금 살펴보려는 ‘홍해 사건’을 통해서 이야기 나누려고 합니다.  
 
*  출애굽기 14장 1-4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이야기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십계」라는 영화도 만들어졌고 「이집트 왕자」라는 애니메이션으로 더욱 더 유명해졌죠.

그 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면서 애굽에 내리신 10가지 기적[재앙]도 유명하지만 홍해를 건너는 기적은 교회에서 많이 설교되고 성도들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관련하여 적용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홍해사건은 손에 꼽히는 이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하심, 위대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홍해사건을 중대한 사건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1장 15절을 보면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나훔 1장 3, 4절에서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그의 약속을 새롭게 하사 그들을 이끌어 내실 때 이르시기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미 7:15)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 사건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변 대적들에게 너무나 큰 인상을 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장 10, 11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

이는 라합이라는 이방 여인의 고백입니다. 이 홍해 사건의 소문으로 인해 멀리 있는 이방인들까지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홍해 사건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많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 홍해 사건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고 애굽 군대는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 여호수아 14장 10절을 보면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 부분에서 많이 공감합니다. 마치 지금 나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닥친 어려움과 그 어려움이 해결되지도 못했는데 뒤에서 닥쳐오는 새로운 고난들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지금 홍해를 앞에 두고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가까이 오기에 심히 두려워 부르짖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 속에서 사면초가, 진퇴양란의 상황에 빠질 때 홍해를 가르신 그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 고통의 홍해도 갈라 주시고 뒤에서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애굽 군대도 몰살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홍해 사건이 나타내는 의미의 전부는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조금 전에 살펴본 그러한 부분들은 주된 의미가 아니고 부수적인 것입니다. 
  
이 홍해사건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를 몰살시킨 것처럼 나의 환경도 다 속 시원하게 해결시켜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본문은 그렇게 적용하면 안 되는 본문입니다. 
  
또 다른 말씀 구절을 예로 들어드리죠.  
성도들의 가게에 가장 많이 걸려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8장 7절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참 좋은 말씀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그렇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욥기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면 이 말씀이 그리 좋은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욥과 세 친구의 말다툼입니다. 욥의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는 것이고 다른 세 친구의 말은 ‘하나님께서 괜히 너를 괴롭히시겠냐? 욥 네가 뭔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빨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과 세 친구를 어떻게 판단하시나요? 
욥기 42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친구보다 욥의 말이 더 정당하고 옳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욥기 8장 7절은 욥의 세 친구 중 한 사람인 빌닷이라는 사람이 욥에게 ‘네가 빨리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8장 7절처럼 해 주실 것이다’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대케 해주시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쓰인 상황을 보았을 때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합니다. 
 
사실 욥기에서 우리가 즐겨 사용해야 할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23장 10절이나 42장 5절 같은 말씀입니다. 특히 23장 10절은 욥기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말씀이죠.
이 말씀도 사실 창대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불순물이 많지만 순금으로 바뀐다는 것이 곧 지금은 미약하지만 창대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말씀은 아닙니다. 단련이라는 말 때문인 듯합니다. 훈련, 단련, 고난, 시련은 우리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금보다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가게마다 걸어놓는 것이겠죠.
  
혹시 이 이야기를 듣고 괜히 집이나 가게에서 이 말씀으로 된 액자를 부수거나 하지 마십시오. 기왕 되어있는 거니까 잘 사용하십시오. 다만 그 말씀이 어떠한 말씀인지 미리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은 이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니구나’라고 분명히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볼 때마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알아야 하는구나’ 생각하십시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은 내가 진퇴양란에 빠질 때 극적으로, 기적적으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힘들 때 구원해 주실 분이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원하는 그러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왜 홍해사건이 있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을 해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광야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돌이켜’란 말이 나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말을 쉽게 풀어놨습니다. ‘가던 길을 돌이켜’라고 말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아주 쉽게 ‘되돌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돌이켜’란 말은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 가고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현재 에담쪽 즉 동쪽 혹은 북동쪽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남쪽 혹은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홍해 사건을 겪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가는 길에 우연히 홍해가 있었고 홍해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은 본래 홍해 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이 가는 길은 홍해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방향을 바꾸라고 하셨고 그들을 홍해를 앞에 두고 건너지도 못하고 광야에 갇힌 자들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홍해를 앞에 두고 애굽 군대가 쫓아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고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따지지만 사실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멀쩡하게 잘 가던 백성들의 방향을 바꾸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출애굽기 14장 3, 4절을 보겠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부로 그들을 홍해 앞에 두고 장막을 치게 하여 애굽 사람들이 쫓아오게끔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와 바로의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시려는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이런 일을 하십니다.  

즉 이 홍해 사건으로 인해 애굽 사람들과 주변의 많은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홍해 사건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를 더욱 알게 되었고 주변의 이방나라도 여호와를 더욱 알게 됩니다. 
첫 부분에 말씀드렸던 부분을 다시 살펴보죠. 여호수아 2장 10, 11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
  
홍해 사건으로 이방인들은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중요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바로 홍해 사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워서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으로 이 사건을 생각하고 믿어왔습니다. 이 착각을 이제 바로 잡았으면 합니다. 
 
홍해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입니다. 지금 나의 어려움, 나의 곤란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에게 주신 환경일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잘못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구원해 주신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건 자체의 목적도 바로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심각하게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꾸 나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와 사역도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한 마디로 착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의 수준으로 나의 상식선으로 이끌어 내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려움에 빠진, 사면초가가 된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니까 그래 내가 도와줄게 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필요할 때 순간순간 나타나서 필요를 채워준다면 이는 도깨비방망이와 같습니다. 필요할 때만 꺼내어 돈 나와라 뚝딱하면 돈이 뚝 떨어지게끔 하는 도깨비방망이처럼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 정체성으로 돌아가 볼까요?
나의 정체성은 ‘내가 주인공으로 멋진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도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나를 지으셨다는 말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공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고 나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내가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모양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체냐 하나님께서 주체로 일하시느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이 편한 데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편하게 생각하고 내 멋대로 생각할 수 있는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홍해 사건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이를 통해 만국에 자신이 여호와임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시지만 그것이 중요한 초점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내 중심적으로만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서 있고 그분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인가?’
나는 하나님의 도구이며, 나는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편하게 쓰시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도구로 쓰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수적인 것들이 주객전도되어 더 부각되지 않아야만 합니다. 
 
나의 정체성! 나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의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아야 합니다. 홍해사건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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