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믿음에 대한 설교를 하기 전에 믿음에 대해 기본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의 믿음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나타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이것을 첫 번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두 번째 믿음이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믿음은 내가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갈렙의 믿음 그리고 야곱의 믿음 그리고 다음에 살펴볼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믿음으로 인한 두 번째 믿음입니다.
첫 번째 믿음, 즉 하나님의 의로 인한 믿음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선물로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면 그 답으로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에서 믿게 되었습니다’라는 말보다는 ‘어느 순간 하나님을 믿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라는 말이 더 정확한 답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근거도 없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나도 인식하지 못할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기억나게 해 주시는 은혜를, 선물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은 자로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두 번째 믿음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빠진 열심과 열정은 자기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적인 멋진 모습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가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첫 등장은 결코 멋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온 열정을 다해서 핍박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했을까요? 예수님을 미워했을까요?
그가 그렇게 열심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비추어보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었고 그의 뜨겁고 열정적인 신앙은 그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아는 것을 실천하고 삶에 적용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는 잘못된 지식으로 인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 믿음이 이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크게 흔들었던 사상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진화론이고 두 번째가 정신분석학입니다.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큰 문제는 정신분석학입니다. 정신분석학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합리화 하며 정당성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트라우마, 방어기제’ 등의 말은 우리에게 이제 익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구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연구의 결과물을 가지고 자신을 합리화할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환경'과 '미성숙한 인간의 본성'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고 믿음이 좋다고는 하는데 너무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리어 피해를 끼치고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모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믿음이 좋지만 나쁜 사람을 이제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 창세기 32장 22~32절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이라는 사람은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야곱의 인생이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듭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의 모습을 보면 부족했던 내 신앙생활이 왠지 안심이 되며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집니다.
의인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또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친 할아버지 갈렙과 같이 성경 속의 아주 뛰어난 인물들 보다는 ‘야곱'이나 '기드온’ 또는 선지자 ‘요나’같은 사람이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야곱.’ 그는 결코 우리보다 더 나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부터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야곱의 이름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야곱이라는 말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에서부터 ‘속이는 자, 도둑놈’ 등 좋지 않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야곱이 흠이 없는 삶을 살았다면 그냥 발꿈치를 잡은 야곱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름의 뜻에서 보이듯이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고 그의 삶 자체가 아주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보면 야곱이 바로에게 가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 그의 인생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정말 파란만장하고 흥미진진하지만 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곱은 이삭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과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자신이 장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형 에서가 있었습니다. 즉 장자권이 형에게 있었습니다.
장자권이란 장자의 신분, 권한 등을 의미합니다. 왜 그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과 권한을 물려받고 계보를 잇게 되기 때문입니다. 좀 다른 의미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주된 통로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계보가 등장하는데 그 계보에 이름이 기록되는 사람들이 바로 장자들입니다. 물론 모든 장자가 장자권을 가지지는 않지만 보편적으로 장자가 장자권을 갖게 됩니다.
장자는 그 가문을 이어주고 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물려받습니다. 다른 형제에 비해 유산도 두 배나 더 받습니다. 장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애굽의 바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세 앞에서 그렇게 고집을 피우던 바로도 장자가 죽어버리는 재앙이 임했을 때에 아주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장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자리인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문제는 오늘의 주인공인 야곱이 장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복은 에서에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외향적이고 남성다운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고 야곱은 내성적이고 조금은 여성적인 사람으로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집에서 주로 거하면서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야기 즉 자신이 태어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많이 듣고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형 에서보다 크게 될 것임을 기대하고 생각하며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초조했을지도 모릅니다.
야곱의 평생의 목표가 여기서 결정됩니다. 장자권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것 하나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만 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방법과 다른 자신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장자가 되기 위해 배고파 힘들어 하는 형도 속이고 건강이 좋지 않아 눈이 어두운 아버지도 속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결국 그는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곁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돌아갈 생각을 할 때에 문제는 형 에서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하지만 야곱은 형 에서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형이 해를 가할 때를 대비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잔머리를 최대한 굴려 재산과 두 아내와 열한 아들을 잘 배치하여 피해를 입을 때에 가장 아끼는 것을 맨 뒤에 두는 순서로 다 보내고 혼자 얍복 나루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시작됩니다.
‘야곱의 씨름’이라고 일컫는 이 사건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야곱이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림으로 하나님과 싸워 이기고 큰 복을 받았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 같지만 진짜 내용을 살펴보면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야곱의 이야기를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주실 때까지 끝까지 매달리며 하나님 바짓가랑이라도 끝까지 붙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야곱은 형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에 대한 두려움으로 재산도 둘로 나누고 아내와 자녀들의 행진 순서도 정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지만 그래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자신의 소유를 보내고 혼자 남게 됩니다. 아니 혼자 남을 정도로 그는 고민하고 갈등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혼자서 밤을 지내게 됩니다. 야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혼자서 잠을 편안하게 잤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밤중에 어떤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 어떤 사람이 누굴까요? 문득 야곱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는 형의 자객이라고 생각될만한 사람과 밤새 씨름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벅지 관절은 넓적다리 부분의 움푹 패인 곳을 가리키는데, 이 부분은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물리적 힘의 생성 부분으로 종종 생명과 힘의 근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이기지 못함을 보고 ‘생명과 힘의 근원’인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물리적 힘의 생성부분’을 어긋나게 만듭니다. 이것은 싸움에 있어서 치명타입니다. 권투에서 말하는 럭키 펀치처럼 이게 상대방을 KO 시켜버리는 펀치 같은 것입니다. 이제 싸움은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앞뒤의 말이 좀 이상합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과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긋나게 했으면 야곱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지 못해서 어긋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상한 것은 조금 있다가 한 번에 살펴보기로 하고 계속 보겠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떠나가려고 하니까 야곱이 매달립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네 이름이 뭐냐? 라고 묻습니다. 그는 ‘내 이름이 야곱입니다. 즉 도둑놈, 사기꾼입니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이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이곳을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생명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남으로 인해 다리를 절게 됩니다.
이 씨름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이 이겼다고 해야 할까요? 야곱이 이겼다고 하기에는 왠지 께름칙합니다.
승리자가 도리어 패배자에게 매달리고 패배자는 멀쩡한데 승리자는 다리를 절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이겼으면 당당히 요구해야 되는데 매달립니다. 게다가 더 모순적인 것은 승리자인 야곱이 생명이 보전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개념과 많이 다릅니다. 이것은 명절 때 벌어지는 천하장사씨름대회처럼 누가 이겼나 싸움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과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라는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됩니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이 씨름을 야곱의 ‘열심 있는 기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싸움의 시작은 야곱에게 있지 않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아있고 시비를 거는 것은 어떤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어려움을 열심히 기도하고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서 시비를 거신 것입니다. 뭔가 요구할 것, 필요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25절에 있는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란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자기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씨름을 이기지 못함이 아닙니다. 진짜 원하는 의도대로 되지 않기에 허벅지 관절을 쳐서 씨름을 이겨버리고 가버리려는 것입니다. 즉 씨름에서 힘이 달려서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어서 먼저 야곱에게 가서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고 그것이 의도대로 되지 않자 그냥 가려고 했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처음에는 형의 자객 정도로 생각했다가 ‘아차!’하고 그제야 하나님임을 알고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야곱! 그는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방법으로 목표를 이루지 않으려는 사람!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을 통해 조상들이 받은 그 복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주인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셔야 하는 자기편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깨지는 곳이 바로 이 얍복 나루입니다. 야곱의 인생에 주인이 지금까지 야곱 자신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깨닫는 곳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승리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제가 정말로 두 손 두 발 다 듭니다. 항복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셨고 여전히 고집부리는 야곱에게 ‘에라 니 멋대로 해라 너 잘났다’라고 하고 가시려고 할 때, 그때서야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씨름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씨름을 통해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자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도둑놈, 사기꾼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께 항복하고 이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야곱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야곱의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즉 항복케 하십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얍복 나루에서의 야곱의 씨름! 하나님께 항복하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야곱이 여러 가지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결국 그는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을 배웁니다. 두 손 두 발 드는 것을 배웁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을 이기려고 했던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을 체험하고 배웁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야곱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해야 할 행동이 바로 항복입니다.
믿음 두 번째 시간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항복’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느냐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느냐!’의 문제에서 얼른 항복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고 내 방법이 더 좋고 빠른 방법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하고 미련하다고 하더라도 항복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이지 않고 지금 상황에서 결코 못할 것 같더라도 항복한 나에게 남은 것은 순종, 복종 밖에 없다는 것이 믿음의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 생각, 방법과는 다른 내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열정적인가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은 빨리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란 존재를 제대로 알고 그저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항복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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