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어떤 칭찬을 가장 듣고 싶어 할까요?
아마도 ‘믿음이 참 좋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좋다’라는 말은 실상 어려운 말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볼까요?
"어떤 모습이 믿음이 좋은 것일까요?"
나름대로 기준을 세우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기준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 여러분에게 ‘믿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다.
믿음을 정의하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알긴 알지만 뭐라고 말하기 어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이유는 솔직하게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은 좋은데 생활이 별로야’ 여기서 믿음은 보통 열정, 열심, 적극성, 봉사 등을 담고 있습니다. ‘주변에 믿음이 좋은 사람은 누군가요?’라는 질문에 우리는 조금 전에 말한 대로 교회에서 열정을 가지고 열심을 보이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행사 때마다 참석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믿음과 생활을 분리해서 평가할 수 있을까요? 믿음은 좋지만 생활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말속에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갈렙이라는 사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렙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에 대한 착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여호수아 14장 12절
12 그 날에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지금은 선수생활을 하지 않지만 올림픽에서 일본 선수를 멋지게 제치고 마라톤에서 극적인 우승을 한 선수가 있습니다.
황영조라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매스컴에서는 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그가 평범한 우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매스컴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에게서 아주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황영조 선수의 폐활량이 보통 사람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찾아냈고 그의 어머니가 제주도의 해녀 출신이라는 것과 연관 지어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황영조 선수를 선천적으로 마라토너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의 많은 훈련과 노력보다는 그의 선천적인 면들을 부각했고 그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뛰어난 사람을 보면 그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 그가 그렇게 뛰어난 이유는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도저히 그러한 자리에 오르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결국 훌륭한 일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확정 지어 버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습관은 성경을 보면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믿음이 뛰어난 성경 속 인물들을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웅으로 여깁니다. 성경 속의 믿음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감탄할만한 일들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을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주인공 갈렙이라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갈렙이라는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아주 뛰어난 인물임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민수기 13장 6절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이 부분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에서 사람을 뽑는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뽑혀 갈렙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은 다른 11명의 정탐꾼과 함께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다른 10명의 정탐꾼과 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그 땅에서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 그러니 그들 보기에도 우리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라고 그 땅을 혹평하였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과 맞서서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는 멋진 말을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00여 년 간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전쟁이라는 것 자체는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가나안 땅 사람의 거대함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큰 벽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명의 정탐꾼의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더 합리적으로 보이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이스라엘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 떠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갈렙의 등장은 우리의 시선을 확 사로잡습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당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당시 분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어쩌려고 우리를 삼키는 이러한 땅으로 이끌고 왔느냐고 따지고 있는데 갈렙은 하나님 편에 서서 온 회중에게 당당하게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멋지게 말하고 있습니다.
격분해 있는 사람들 앞에서 정 반대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렙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렙!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그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그의 단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갈렙의 그러한 면들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와 멋지다.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가오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정말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나도 그와 같이 행해야지’란 느낌을 받습니까? 아니면 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에 거리감을 느끼십니까?
멋진 사나이 갈렙이 우리와는 동떨어진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조금은 짜증이 날 정도로 완벽한 갈렙의 모습에 우리는 기가 죽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예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지’라고 생각하면서 관심조차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갈렙의 모습은 신앙적으로 너무나 훌륭하고 좋지만 갈렙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갈렙의 모습은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흔히 우리가 너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듯이 말입니다.
그 뛰어난 갈렙이 오늘 본문에서 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갈렙은 85세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습니다. 갈렙이 정확하게 몇 세에 죽음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여호수아의 나이를 생각할 때 갈렙의 나이는 결코 청춘은 아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 노인 갈렙이 여기서 또 멋진 말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찬양 가사가 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 우리는 갈렙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한 번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면 더욱 실감이 날 것입니다. 현재 나이로 잘 봐줘서, 한 70세로 생각해 봅시다. 그 70세의 한 노인이 전쟁 중에 대장에게 가서 젊고 전쟁에 능한 사람들도 다들 힘들다고 거부하는 그 전쟁을 ‘제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반드시 해 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냥 ‘참 멋진 말을 한다!’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더 좋은 땅 주지 않는다고 떼쓰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와서 하는 말은 젊은이들도 싫어하는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 갈렙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신앙의 모습은 너무나 완벽하고 훌륭하기에 ‘그는 그고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게끔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갈렙이 오늘 본문에서 더욱더 멋진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갈렙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훌륭함이 우리에게 ‘어떤 느낌이 들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의 너무나 뛰어난 모습과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비교해 보면 주눅이 들고 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만약에 제가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성도들이 말을 안 들어 짜증 나고, 일이 많아서 더욱더 짜증이 나고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잘하지 못하고 있는데, 저보다 나이 많은 목회자가 성도들이 말을 안 들어도 웃고, 일이 더욱 더 많아져도 웃음을 잃지 않고, 누가 힘든 일을 부탁해도 다 들어주면서 즐겁게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 곳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어려움은 나의 밥이다.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도 다 해낼 수 있으니까 다 내게 달라’고 말한다면 제가 그 목회자를 어떻게 볼게 될까요?
물론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고, 계속 성장을 추구하고 어느 정도 신앙적 수준이 될 때는 다르겠지만 짜증만 나고 힘들 때는 어떻겠습니까? ‘정말 훌륭한 사역자다. 나도 저 사역자처럼 돼야지!’란 생각보다는 ‘그래 너 잘났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실제 우리의 신앙 모습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상태가 아주 뛰어나게 좋을 때가 아니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갈렙의 모습은 우리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갈렙 ‘그들은 우리 밥이다’란 멋진 말을 한 그가 노망이 들었는지 오늘 본문에서 85세의 나이에 주책없이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정탐할 때의 그 일로 우리의 기를 죽였으면 됐지 85세의 나이에 더욱더 멋진 말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합니다.
이 노인의 모습과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에 결국 그를 내가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나와 차원이 다른 사람, 그는 성경 속의 아주 뛰어난 인물, 나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위인과 영웅, 하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평신도! 평민이다!’라고 스스로 나를 평가절하합니다.
그래서 오늘 반대로 내가 아닌 갈렙을 ‘평가절하’ 해보려 합니다.
먼저 그의 이름의 뜻부터 시작하죠. 그의 이름의 뜻은 ‘짖다’ 또는 ‘공격하다’에서 유래되어 ‘공격자’란 뜻도 갖지만 ‘개’란 뜻도 갖습니다. 이 ‘개’라는 말은 당시 남자 매춘부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썩 좋은 이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기분 나쁜 이름입니다.
그럼 그의 출신은 어떨까요? 여호수아 14장 6절을 보면 그를 ‘그니스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니스는 ‘그나스 사람’이라는 의미로 종족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나스’를 찾아보면 창세기 36장 11절에 처음으로 에서의 자손 중에서 그나스가 등장합니다. 에서는 정통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통을 따진다면 갈렙은 비정통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갈렙이 그나스의 후손으로 그니스 사람일 것이다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갈렙의 족보는 그리 내세울만한 족보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을 개처럼 여겼습니다.
개란 뜻의 이름을 갖고 개처럼 여기던 이방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갈렙!
그런 그가 어떻게 ‘그들은 우리 밥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란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뛰어난 것, 아주 놀라운 비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그에게는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그의 아주 놀라운 비법은 바로 ‘선착순’입니다.
선착순이라는 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특히 많은 주부들에게 아주 민감한 단어일 것입니다. 대형마트 같은데서 ‘5만 원 이상 구매고객에게 선착순 20명까지 푸짐한 선물을 드립니다’라고 광고하면 그것이 꼭 필요하지 않고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사러 갑니다.. 바로 그럴 때 사용하는 선착순입니다.
갈렙의 뛰어난 면, 그것은 그가 ‘선착순’에 있어서 가장 날렵했다는 것입니다.
정탐꾼 사건에서도 오늘의 사건에서도 이는 동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산지 즉 헤브론은 선착순에 걸린 상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헤브론에 아낙 사람, 거인이 있고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한 것하고 상관없이 이는 선착순에 걸린 상품입니다. 그리고 갈렙은 ‘요이 땅!’ 했을 때에 가장 빨리 뛰어가 줄을 선 사람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당시 갈렙보다 먼저, 겨우 말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이 산지를 내게 주십시오’라고 말했다면 그 땅 즉 헤브론은 그 어린아이의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만약에 가냘픈 여인이 갈렙보다 먼저 말했다면 그 여인의 손에 그 땅은 넘어갔을 것입니다. 몸에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갈렙보다 먼저 그 이야기를 했다면 몸이 불편한 장애를 가지고도 그 땅을 취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렙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4장 12절에서 갈렙은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편에서 서신다면’이라고도 번역을 했습니다.
갈렙이 그 땅을 취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은 강력한 새로운 무기나 인원, 병법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면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건은 즉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갈렙이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것이 확실하다면 그 땅을 취하는 것은 그냥 그 땅에 가기만 하면 아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보고 제가 선착순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땅을 당연히 취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고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소리만 지르고 나가면 그냥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상인이 물건을 팔 때 ‘선착순 10명에게는 정가의 두 배로 물건을 드립니다’ 하면 누가 가서 그 물건을 사겠습니까?
즉,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의 내용을 잘 알아야 선착순에 설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고,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연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이라는 그 땅에 있어서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땅을 필요로 하는 이스라엘의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이 너무나 좋은 땅이기에 이스라엘이 기를 쓰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곳에서 제사장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게 하시기 위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 내용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굳건히 믿는다면 가서 줄만 서면 됩니다. 이를 아주 어려운 말로 ‘순종’이라고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정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아낙자손, 거인,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땅을 주시겠다고 했으니까 그 누구보다도 재빨리 ‘저요’라고 외쳐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갈렙이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준다고 하실 때에 재빨리 가서 가장 먼저 줄을 선 것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손을 들기 전에 먼저 잽싸게 손을 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도 이 원리는 등장합니다. 골리앗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싸움의 본질이 어떠한 싸움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그 전쟁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와 싸우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다윗이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매끄러운 돌 다섯 개로 평소 솜씨를 발휘해 골리앗을 죽였다. 우리도 다윗처럼 평소에 실력을 쌓아 준비하고 언제든지 사용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싸움은 다윗이 막대기와 돌이 없어도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극단적으로 무기가 없이 빈손으로 나가서 목소리만으로도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이 다윗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17장 47절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갈렙! 그는 줄을 기가 막히게 잘 선 사람입니다. ‘저요’를 가장 먼저 외친 사람입니다. ‘선착순’하고 외칠 때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선착순’에 달려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믿음이며 그 결과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갈렙의 선착순을 가능케 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제대로 된 앎이 그를 순종케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근원과 많은 부분을 자신에게 둡니다.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줄 알아?’ 내가 더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이 커지도록 발버둥을 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아는 것!
내게 어떠한 능력이 있고 열심과 열정이 있어서가 아닌 하나님이시기에, 언약의 하나님이시기에 본인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갈렙이 자신의 능력과 계획에 앞서 뛰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갈렙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성실과 열심, 열정으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갈렙의 멋진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셨습니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를 아신다면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알기에 우리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냥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 땅이 당장 손안에 취한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렙의 모습을 잘 설명한 말씀이 바로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갈렙은 믿음으로, 아직 이뤄지지 않은 가나안 땅의 실상을 봅니다.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약속을 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아는 데에 있어서 가장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내가 교회에서 직분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더 높은 직분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정작 성경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몇 번 읽었다고 말은 하지만 성경의 내용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주일학교 교사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의 이름도 외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경 66권의 이름과 성경에서의 그 위치도 잘 모른다는 것이죠. 이는 아주 많이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줄을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가장 먼저 생각할 부분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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