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 설교] "팔복(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마 5:1~12)

소리유리 2024. 8. 10. 17:10
728x90
반응형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입추가 지났지만 날씨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팔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팔복 마지막 설교입니다. 

 

팔복은 전부 연결됩니다. 그리고 팔복은 모두 누려야 할 복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개의 복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여덟 번째 마지막 복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 것은 나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의미합니다.

나의 영적 상태가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것!

결국 그러한 자들이 바로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기에 그로 인해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  
죄로 인해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함을 깨닫고 필연적으로 애통하는 자!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철저하게 애통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하늘나라의 기업입니다. 

 

네 번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한 자는 온유할 뿐만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날마다 영적전쟁을 치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다섯 번째 복은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긍휼은 측은함과 행동이 합쳐진 것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긍휼히 여기며 그들이 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에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긍휼함과 행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복은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그냥 착하고 순진한 것을 초월한 그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 목적에 있어서 다른 것들과 혼합되지 않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한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 복은 본격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입니다.  

 

일곱 번째 복음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평화를, 화평을 이루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주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사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렸죠.

화평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평으로 특별히 화평을 우월감이라는 측면에서 설교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나의 우월감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덟 번째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 살펴볼 본문은 10~12절입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여덟 번째 복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와 연결되어 바로 나오는 이 복은 앞의 복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로 앞의 복만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의를 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앞의 일곱 가지 복을 누리는 자들에게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일곱 가지 복을 한 마디로 한다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은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 

그것은 성품을 닮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의 행동과 그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았듯이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의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았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 된 증거와 표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의'라는 것은 세상적 기준으로 말하면 옳은 것, 선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의를 행하게 되면 대접을 받습니다. 

잘만하면 매스컴에도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의를 행하게 되며 박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의와 동일하다면 굳이 다른 종교와 싸울 필요도 없고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의를 보일 때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의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빌립보서 3장 5~9절을 보겠습니다.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의는 내가 가진 어떤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의는 보통 말하는 것과 아주 많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의는 죄짓지 않는 것이 전부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의입니다. 

이러한 '의'로 인해 세상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고 외면하고 하나님을 반대해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의 의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함이나 다른 이들에 비해서 우월함을 보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추구하면서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전제로 하는 의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의'이고, 이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고 죄인 된 우리의 모습, 절망의 모습, 사악한 모습이 폭로되는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들이 의를 위하여 살아갈 때 적개심을 가지고 조롱하고 가까이하기 싫어합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의지할 필요가 없고 다른 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들이 나를 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를 위한 박해 이것만큼 분명한 신자의 표가 없습니다. 
참다운 신자에게 보이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내가 참다운 신자로서 의를 위하여 살아가면 주변의 사람들은 나로 인해 인간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또는 고민하지 않아도 반발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로 인한, '의'로 인한 박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다. 

진리로 인한 박해를 감당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신자 된 본분을 지키고 세상에서 불이익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자 된 본본을 지키며 신자로서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천국 시민으로 제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면 박해를 받습니다. 

의를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욕하고, 박해하고, 모든 악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천국 시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전의 선지자들도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천국 시민으로 제대로 살면, 앞의 일곱 가지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의를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12절 이후에도 설명합니다.

특히 13절을 보면 이러한 자들을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빛이기에 어두움 가운데서 그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싫어합니다. 
썩어져 가고 변질되어가고 있기에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그 소금을 멀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좋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그대로 사는 것!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

그것은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이고 지금 이 세상은 그것들을 싫어하고, 그 일을 감당하는 자들을 박해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편하고 즐겁게?
물론 세상과 담을 쌓고 거부하면서 세상을 죄악시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세상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가 박해를 당합니다. 
가끔은 눈이 시릴 정도로 가슴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답답하고 안타깝고 정말 속이 뒤집어집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의 마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데로 우리도 바라보며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일들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박해도 견디어야만 합니다. 

타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우리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나오는 복이 있습니다. 

첫 번째 복과 동일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우리는 천국 시민, 백성으로 이 세상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모두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냥 어려움과 힘듦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하는 원인이 '의를 위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가운데 내가 박해를 받고 있느냐?'는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내가 천국 시민, 백성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칭찬을 받으면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들에게도 늘 칭찬만 받고 그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이 그들과 잘 어울려 산다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더 어렵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 우리들은 종종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타협하고 포기합니다. 

 

의를 위하여 힘들고 어렵고 박해를 받느니 적당히 하자는 생각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라!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천국 시민이다'라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내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박해를 받고 있나요? 아니면 편한 삶을 살고 있나요?
물들지 마시고 타협하지 마십시오. 

아닌 것은 아닙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의를 위하여 살면 당연히 쫓아오는 것이 바로 박해를 당하는 것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 박해를 받으면서 또한 꼭 기억할 것은 '나는 천국 시민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팔복을 마치며 여덟 번째 복을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일곱 번째 복까지 누리는 사람은 반드시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의를 위해 살아갈 때 내 주변의 어두움이 나를 박해합니다. 

어려움이 닥칩니다. 

 

먼저 그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당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임을 기억하며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