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 설교] "팔복(5)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1~12)

소리유리 2024. 7. 20.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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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로 팔복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매주 말씀드리지만 팔복은 순서대로 복의 내용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앞의 복이 뒤의 복과 연관됩니다. 

오늘도 이전의 복들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 것은 나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의미합니다.

나의 영적 상태가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것!

결국 그러한 자들이 바로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기에 그로 인해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  
죄로 인해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함을 깨닫고 필연적으로 애통하는 자!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철저하게 애통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하늘나라의 기업입니다. 

 

네 번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한 자는 온유할 뿐만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날마다 영적전쟁을 치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이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이제 다섯 번째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7절입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또다시 반복합니다.

팔복은 하나하나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그 의미를 갖습니다.

 

앞의 네 가지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입니다.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

이 복이 어떻게 앞의 4가지 복과 연관이 되는가?

이 생각을 하며 따라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할 때 하나님께서 내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시작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주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들을 만나기도 하죠. 

아주 성질 더럽고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신앙이 없어도 성격이 정말 좋은 사람이 더 낫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지금 믿음이 없어도 그런 사람을 전도하는 게 더 좋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든 기준에서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의 단점들도 장점으로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즉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섯 번째 복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에 대한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한 자가 가지게 되는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온유한 모습!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한 것이 오늘 나오는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유란 것이 내게서 다른 이들에게 나타내어지는 나의 소극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긍휼히 여기는 자는 온유의 적극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큰 변화를 겪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기질, 성격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팔복을 살펴보다 보면 변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안 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긍휼히라는 것이 무엇인가? 

긍휼과 붙어 다니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은혜와 긍휼을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는 죄를 지은 사람들과 특히 관련되고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특히 관련된다.

은혜가 죄를 전체로써 내려다보는 반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이 합쳐진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즉 긍휼은 측은함과 행동이 합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리는 먼저 돈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물질이 전부가 아님을 조금 지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해결책이라는 것은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이 모색되는 것이죠.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모든 일들은 죄에 대한 결과입니다.

죄의 비참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복음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긍휼입니다. 

죄에 대한 비참한 결과!

불쌍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

측은함과 행동의 결합!
이것이 긍휼입니다. 

자신에 대한 무능력, 안타까움은 이제 됐습니다. 

이제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앞에 있는 복들을 경험한 내가 이제 어떤 자로 변했는가? 

 

이전에는 내가 잘났고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다 틀리고, 꼴도 보기 싫은 사람들도 이제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비참한 결과로 인해 고통 속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긍휼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을 너무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성화라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더욱 구원의 완성의 길로 들어가는 자로서 이제 구원받지 못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바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플 때 도움을 받았다면 다른 이들의 배고픔도 살펴볼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런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을 보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자라면 달라집니다. 

배려를 배우고 주는 것을 배웁니다. 

긍휼!

어떻습니까?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긍휼히 생깁니까?

측은한 마음이 생기고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습니까?


자신의 무능력함,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죄인으로 인한 애통 그리고 이제는 정말 자녀답게 살아가보겠다는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나와 같다는 것!

그들도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고쳐주고 싶고, 위로를 받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성경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가장 긍휼의 모습을 보여주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도 여전히 죄인인 우리를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또한 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9, 60절입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바로 스데반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태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어 천국에 가지만 지금 저 죄인들을 바라볼 때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기도를 합니다.

이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긍휼히 여기는 것은 정말 앞의 복을 철저하게 누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경험했는가에 따라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그것을 통해 내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영적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매번 하나님께 회개와 감사를 반복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고 그들이 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에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싶은 욕망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누리는 복이 바로 긍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시고, 함께 해 주시고, 나를 감싸주시는 그 은혜!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는 바로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기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특별히 교회에서만 보여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가족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정말 이제는 변화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측은함과 행동의 결합!

마음만 먹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함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말은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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