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로 계속해서 하박국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로 3번째 설교를 합니다.
두 번에 걸쳐서 살펴본 하박국서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픔들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박국의 기도에 아주 놀라운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세밀하게 표현해 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어땠을까요?
어떠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니 항의를 합니다.
지난번 살펴본 것이 첫 번째 항의라면 이번이 두 번째 항의라고 할 수 있겠죠.
두 번째 항의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박국 1장 12절에서 2장 1절까지 보겠습니다.
12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2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잠시 등장합니다.
요약하면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그 하나님을 반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는 것은 그의 신앙고백이면서 다음 말을 이어가기 위한 포석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표현을 가끔씩 쓰기도 합니다.
좋은 이야기로 먼저 분위기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때 상대방을 먼저 칭찬하고 부탁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말합니다.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심판하시기 위해서 그를 두셨습니까?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경계하시기 위해서 그를 세우셨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경계하다는 말은 ‘바로 잡다, 책망하다, 바른 것을 보여 주다’라는 뜻입니다.
말이 반복됩니다.
‘주께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여기서 ‘그를’은 갈대아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원하시고 거룩하시고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스스로 갈대아 사람을 두시고 세우실 수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주께서’라는 말은 ‘강조대명사’로서 본문에서 강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또한 하박국 선지자는 ‘나의’라는 단어를 계속적으로 사용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여기서 '나'는 '이스라엘의 전체'를 대표하는 말로 쓴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이러한 하나님께서 어떻게...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13절입니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원하실 뿐만 아니라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도 그다음의 말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신데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라고 하박국 선지자는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잠잠하시나이까'는 말은 깊은 침묵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이 침묵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냥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주변에는 온갖 악이 가득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의인보다 악인이 더 잘되는 것을 보는 상황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고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침묵만을 지키시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많은 불신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악하고 내가 하나님을 욕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진짜로 계시다면 벼락을 내려봐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것들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불러 봐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만을 지키고 계십니다.
더 어이없는 것은 오랜만에 침묵을 깨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악한 자를 세워 너희를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같이 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들이 있었고 이스라엘에 비해 갈대아 사람들은 더욱더 악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같은 상황에 있는 우리들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어서 14절을 보겠습니다.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잠잠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바다의 고기 같고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다고 합니다.
'바다의 고기'란 돕는 자도 없고 도움을 호소할 힘도 없는 것을 표현합니다.
삼키는 자에게 대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벌레는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 벌레는 어떠한 보호자도 주권자도 없는 완전히 버림받은 미물들입니다.
그러한 미물에 사람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악을 그냥 넘기시지 않는 그 하나님이 너무 잠잠하십니다.
너무나 잠잠히 계시기에 이스라엘은 마치 바다의 고기 같고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다고 호소합니다.
15~17절입니다.
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갈대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다 취하며 그물로 잡고 투망으로 모으고 이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로 인해 그물과 투망 앞에 제사하고 분향합니다.
이 그물과 투망은 갈대아 사람들의 힘을 상징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에게 있어 일은 아주 순조롭고 결과도 좋습니다.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킵니다.
악행에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것이 옳은 것이냐고 따집니다.
항의합니다.
하나님의 잠잠함, 즉 침묵으로 인해 악인들이 더 떵떵거리며 더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은 도대체 지금 무슨 꼴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침묵만 하고 계시는 겁니까?
선택했고 무언가 특별한 관계에 있다면 이쯤 돼서는 나서야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닙니까?
그동안 좋은 말들로 ‘나의 자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거룩하다, 너의 방패, 요새, 반석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러한 것을 증명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침묵하십니다.
이러한 답답함을 경험해 본 사람 있습니까?
엔도 슈사꾸라는 일본 작가가 쓴 ‘침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보면 일본인 선교사와 신도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십니다.
한 번 정도 멋진 기적이나 이적을 보여주시면 반전이 일어날 듯도 한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때도 그랬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자의 밥이 되고 칼에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경험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장 1절입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하박국 선지자는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를 기다립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 이야기는 하박국 선지자가 자신의 직무를 계속 성실하게 감당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물론 파수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지켜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기다린다’라는 말이 가장 앞에 그리고 강조되는 피엘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오늘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아주 많이 힘들게 합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갈림길에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기다리는 데 아무런 신호도, 힌트도 주시지 않습니다.
주변의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나의 삶에 밀려올 때에 나는 어떠한 반응을 할 것인가?
좀 전에 말씀드린 엔도 슈사쿠라는 일본 작가가 쓴 ‘침묵’이라는 책은 요세페 캘러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여 쓰인 역사소설이기도 합니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를 달고 있는 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 여러 가지 고문 방법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구멍 매달기’라는 고문이 있습니다.
깊은 구멍을 파고 사람을 거적에 싸서 거꾸로 매달아 놓는 것인데 그냥 두면 금방 죽기 때문에 귀 뒤에 작은 상처를 내서 그쪽으로 피가 떨어지게 하면 오랫동안 죽지 않고 고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뜨거운 온천물을 죽지 않을 정도로 계속 붓는 것. 밀물과 썰물이 심한 바다 한가운데 나무를 박아 사람을 매달아 놓는 것 등 많은 고문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인가?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왜 이 고통을 주시고 침묵하고 계신가?’
하나님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은 해체됐지만 주찬양이라는 복음성가 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부른 곡 중에서 ‘침묵의 언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자욱한 아침안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답답함 속에 그래도 길이 있음에 누려지는 평안함
애쓰고 부르짖어도 대답 없는 묵묵 부담 하나님의 긴 쉼표 그 막막함
낡고 부질없는 잡다한 언어 속에 제한되신 하나님 갇혀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침묵)
이 모든 것은 파기하는 그분의 은혜 오히려 침묵 속에 듣는 그분의 음성
기다림 속에 깃든 심해 같은 평안함
숲 풀 길가 돌멩이 바람 낙엽 밟는 소리 침묵 중에 말씀하시는 그분의 언어
영원 속의 시간, 시간 속의 영원 영원히 주님과 함께
쉼표와 마침표를 구분하는 믿음과 지혜 그 어떤 것이든 그분에게서 온 것이든
넘치는 감사와 찬양
조금은 어려운 가사의 찬양이죠?
한 가지 가사는 꼭 기억하십시오.
'쉼표와 마침표를 구분하는 믿음과 지혜'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힘든 것은 그 침묵이 마침표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침묵... 하나님의 침묵...
여러분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박국 선지자...
그는 하나님의 침묵에 미칠 듯하고 답답해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하실지 기다립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만을 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라는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라는 그의 마음속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도망갑니다.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로 다시 되돌려 놓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그때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고독한 싸움처럼 느껴지는 이 싸움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기다림을 통해 이 싸움이 고독한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또한 이 싸움에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희망적인 말씀을 드리고 마친다면 하박국 1장 1절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경고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그 경고는 하나님의 침묵이 무관심이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이 침묵의 가치는 그 순간보다는 지나고 난 후에 알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성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간의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욥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아무리 외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중에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에 대해 눈으로 뵐 정도의 성장을 하게 됩니다.
침묵... 하나님의 침묵은 그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침묵이 내게 닥칠 때에 내가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면 끝까지 견디고 기다리는 것...
그냥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뭔가 새로운 방법을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하나님 안에서 그저 기다리고 견디는 것.
아까 들은 찬양처럼 하나님의 침묵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입니다.
하나님께 항의하고 울부짖고 소리 질러도 좋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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