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설교] "하박국(1) 어느 때까지... 어찌하여"(합 1:1~4)

소리유리 2024. 4. 6. 14:18
728x90
반응형

 

4월 첫 주일입니다. 

날은 따뜻해졌고 벚꽃도 만개했습니다. 

주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봄맞이 행사도 이곳저곳에서 있고 총선으로 시끌벅적합니다. 

 

많은 변화 중에 실제적으로 나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변화는 없습니다. 

특히 어려움, 고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제와 오늘이 여전합니다. 

계절이 바뀌고 주변에 변화가 일어나지만 정작 내겐 변화가 없습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봄이 왔지만 실제로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듯합니다. 

물론 좋은 일들이 시작되고 문제들이 해결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말씀을 통해 미리 새겨놓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번 룻기 설교가 끝났습니다. 

오늘부터는 이름도 특이한 하박국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박국서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적용했으면 합니다. 

답답한 이 시대에 꼭 살펴보았으면 하는 본문입니다. 

 

특이한 이름의 소유자인 하박국이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그의 이름의 뜻은 ‘안으리라’ 즉 ‘포옹’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하박국 3장 19절의 말씀에 비추어 성전에서 찬양하는 레위 사람의 후손이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특히 남 유다의 선지자로서 활동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할 때 같이 활동하던 선지자로 보입니다. 

그가 활동할 때 유다의 왕은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시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여호아하스라는 왕이 3개월 만에 애굽왕 바로느고에게 폐위를 당하고 그다음에 세워진 왕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왕에게 아부를 하고 많은 음과 금을 백성에게서 빼앗아 애굽왕에게 바친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장 13절에서 19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여호야김은 나라가 어려운 가운데서 강한 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백성들에게는 자신의 궁전을 짓게 하고 무죄한 피를 많이 흘리게 한 왕입니다. 
이러한 왕의 때에 활동한 선지자가 하박국이라는 선지자입니다. 


나라는 망해가고 다른 나라 왕으로부터 압박을 받습니다.

왕이라는 작자는 그러한 이방인에게 아부나 떨고 백성에게는 착취를 하고 압박하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어떠한 심정으로 부르짖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하박국 1장 1절에서 4절입니다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서의 시작은 ‘경고다’에서 시작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경고다'로 시작됩니다.

이 경고라는 말에는 신탁, 예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보통 무거운 짐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이는 선지자에게 큰 부담이 된 말씀이라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도 무거운 짐이 되는 말씀이라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2절부터 시작됩니다. 
2절부터 4절의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은 여호야김의 악한 통치를 받는 하박국 선지의 탄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히브리 원문에서는 ‘어느 때까지리이까, 여호와여!’란 구절이 앞에 나옵니다. 

히브리어는 그 순서를 바꿀 수 있고 강조하는 말을 맨 앞에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할 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심정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보통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저는 보통 ‘사랑의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보통 우리는 기도를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웁니다. 

 

장로님 혹은 권사님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앞의 멋진 수식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끔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가 많지만요. 

무소부재, 전지전능 등을 주로 많이 사용합니다. 

하지만 오늘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기도의 시작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여호와여!’ 

처음부터 이렇게 강하게 나가는 기도. 하박국 선지자는 왜 이런 기도를 해야 했는가? 

그것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의 기도의 시작을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하고 시작합니다. 
그가 얼마나 괴롭고, 힘들고 , 그 힘듦으로 인해 지쳐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어느 때까지냐고 하나님께 묻는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먼저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그 듣지 않는 것을 언제까지 하시겠습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부르짖다는 말은 원어를 보면 ‘도움을 호소하다’라는 말인데 히브리어 동사로 ‘피엘형’으로 쓰입니다. 
피엘은 ‘강의형 동사의 능동태’라고 하는데 피엘형이 무슨 뜻인지는 알 필요가 없고 이 피엘형으로 쓰일 때 이 단어는 더욱 강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즉 이 본문의 뜻이 그냥 부르짖다가 아니라 간곡히, 아주 간곡히 힘을 다해 부르짖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주 강력하게 하나님께 늘 계속 부르짖는데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의 첫머리는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어느 때까지입니까? 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강포요’라고 외쳐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강포라는 말은 권력 있는 자의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학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을 당해서 하박국 선지자는 ‘강포요!’하고 외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은 꿈쩍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계십니다.

'외쳐도'라는 말은 '우레 같은 큰 소리로 외친다'를 뜻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데 여전히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이라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것도 맨 처음에 한탄하는 듯이 마치 긴 한숨을 쉬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의 탄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를 괴롭히는 상황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어찌하여’라는 말을 합니다.

그의 심정을 읽어보셔야 합니다.

같이 느끼셔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십니까?

죄악이라는 말은 ‘모든 비극과 곤고의 근원이 되는 악’을 의미하고 패역이라는 말은 ‘압박과 착취로부터 오는 곤고, 수고, 진통, 해악’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게 한다고 표현하는데 원문을 통해 보면 아주 자세하게 보는 것입니다. 
살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로 듣고 사진 정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깊은 생각과 주의를 기울여서 보는 것 또는 차마 볼 수 없는 참상을 옆에서 참고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옆에서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의 그러한 일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바로 어찌하여!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의 앞에 겁탈, 강포가 있고 주변에는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겁탈이란 말은 파괴와 황폐, 약탈과 살해 등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변론과 분쟁을 통해 하박국 선지자의 이 탄식이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론과 분쟁이란 단어를 통해 지극히 혼란한 유다 왕국을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심정을 이해하십니까?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파괴와 황폐, 약탈과 살해, 모든 종류의 악, 압박과 착취 등의 역겨운 현실이 그의 눈앞에서 벌어집니다.

그는 그것을 자세히 보고 있습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하나님께 울부짖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그가 울부짖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치 않으십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을 탄식하고 또 탄식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답답해합니다. 


4절의 ‘이러므로’는 앞의 2절과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주께서 구원치 않기 때문에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의인을 둘러쌌고 재판과 판결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속한 유다라는 나라를 바라보면 외치는 내용입니다. 
악한 왕 여호야김 시대의 사회상의 아픔을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의 안타까움, 답답함, 속이 터지는 그 느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까?

유다 왕국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나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가는 중요한 나라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 나라로,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온갖 악이 무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나라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나라가 이방 나라에 아부나 하고 그들의 비위나 맞추고 나라의 왕이라는 작자는 백성을 괴롭히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 
예레미야 36장 20~26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20   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을 왕의 귀에 아뢰니
21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의 귀에 낭독하니
22   그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24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25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26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야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지켜야 할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화로에 불태워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와 서기관 바룩을 잡아 없애려고 합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서 울부짖는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을 느끼십니까?

우리의 현실을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모습, 남유다의 모습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우리의 주변을 살펴봅시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그 시대와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경악스러운 뉴스들이 쉴 새 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젠 놀라지도 않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의와 거짓이 난무합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정과 불법 이야기도 신문, 인터넷에 등장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이익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야기들...

한 마디로 공의와 정의는 없어진 사회입니다. 

교회도 그 사회를 따라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말 우리들의 눈에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어떻게 보입니까?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가 온전히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본인이 하나님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은 없는 것처럼!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에 비해 결코 지금이 좋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시대의 어려움은 비슷하고 답답함도 동일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울부짖음, 부르짖음을 찾기 어렵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어떻게 이런 일이'를 외치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종교적 모습과 형식적인 기도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이라고 울부짖는 그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죄악 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보면서 ‘어찌하여’라고 탄식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내가 처한 이곳에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 시작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 너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지 마십시오.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시각을 갖길 기도합니다. 

그저 현실에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일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큰 일을 많이 당해서 '어찌하여'라는 탄식보다는 '다 그런 거지'하고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는지요?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니까 그 악함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며 기도하기보다는 그냥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상이 아닌 것을 보면 우리는 안타까워해야 하고 기도하며 울부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대가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보다 결코 낫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 못지않게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정상입니다. 

가장 무서운 병은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이 병에 들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부르짖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살아가는 내가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의 기도가 오늘, 지금, 바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