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설교] "룻기(10) 아무개와 보아스"(룻 4:1~12)

소리유리 2024. 3. 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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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0번째 시간입니다. 

4장으로 들어갑니다.

다음 주면 룻기가 끝납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보통 기준을 처음 세울 때 낮은 기준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높은 수준의 기준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점 그 기준이 낮아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일을 하자'는 결심은 시간이 지나가면 '누군가에게 피해만 끼치지 말자'로 변합니다. 

최소한의 기준으로 점점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기준의 가장 큰 중심에는 나의 이익이 있습니다. 

 

처음에 타인을 위한 생각에서 점점 타인은 사라지고 나의 이익만 남습니다. 

'우리'에서 시작해서 '나'로 끝납니다. 

공동체가 점점 더 약화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굳이'라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굳이 타인을 위해? 굳이 내가 손해 보면서까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그냥 성실하게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모든 책임과 의무를 퉁치려고 합니다. 

헌금도 잘 내고, 매일 성경 읽고, 묵상도 하고 찬양도 들으면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좋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일까요?

악을 행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일까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화목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악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지 못했을 때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하고 또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소극적으로 그저 다른 이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저 중간만 간다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신앙생활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유합니다.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것은 실상 퇴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그것에 민감해야 합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 않음에 부끄러워해야만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그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미와 책임을 다한 것처럼 가르칩니다. 
해야 할 선을 하지 못함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해야만 합니다. 

최소한의 신앙생활을 해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 심각한 현실입니다.

점점 선을 행하지 않는, 적극적이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무뎌져갑니다. 

시간이 더 흘러감에 따라 이것이 문제라는 인식도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 본문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오늘 아무개와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나는 어느 쪽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 4장 1~12절입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은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오늘 본문에서 두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좀 전에 말한 아무개와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인 아무개는 기업 무를 자입니다. 

1, 2절을 보겠습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는 룻과 약속한 후에 일을 진행시켜 나갑니다. 
보아스는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아 기업 무를 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립니다.  
마침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기업 무를 자를 이렇게 부릅니다. 

 

'아무개여'

아무개는 아무를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아무는 '어떤 사람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다른 번역성경은 '여보시오, 여보게'로 번역했습니다. 

 

보아스는 그를 청하고 공적인 절차를 위해서 성읍 장로 10명을 청합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3, 4절입니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는 그에게 엘리멜렉의 소유지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원문에서는 밭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즉 우리 형제 엘리멜렉에게 속한 밭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기업을 무를 자가 없다는 것이죠. 

이 말을 들은 기업 무를 자는 귀가 솔깃했을 것입니다. 

한 성인 남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에게 속한 밭은 친척들이 우선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척이라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선 촌수가 가까운 사람부터 밭을 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보아스의 말에 귀가 솔깃했고 그 밭을 나오미가 팔려고 한다는 말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당장 자신이 그 기업을 무르겠다고 말합니다. 

 

5, 6절입니다.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기업 무를 자가 자신이 무르겠다는 말을 들은 보아스는 룻에 대한 언급합니다. 

5절을 공동번역 개정판을 보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5   보아즈가 다짐하였다. "나오미에게서 밭을 넘겨받는 날 당신은 고인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떠맡아야 하오. 그리하여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주어야 하오."

 

5절의 말씀은 좀 복잡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장 기업을 무르겠다고 한 아무개가 6절에서 바로 내가 무르지 못하겠다고 할 만큼의 내용입니다. 

 

나오미의 밭과 함께 룻도 떠맡아야 합니다.  

아마도 기업 무를 자는 나오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나오미가 나이가 늙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땅은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의 이야기를 합니다. 

젊은 과부 룻은 맡아야 한다는 말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순간적으로 계산을 합니다. 

젊은 과부 룻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엘리멜렉의 집안을 잇게 됩니다.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 땅이 아이의 소유가 된다는 말입니다. 

 

차근차근 계산해 보겠습니다. 

우선 땅 값을 지불하고 삽니다. 

그런데 땅으로 끝나지 않고 룻과 결혼해야 합니다. 

후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클 때까지 양육합니다. 

문제는 그 아이가 크면 자신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잇는 자가 됩니다.

자신이 산 그 땅은 자기의 것이 아닌 그 아들의 것이 됩니다.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재산적인 손실이 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6절입니다. 

공동번역 개정판입니다. 

 

6   그러자 그 친척은 "그랬다가는 내 재산만 손해를 보게 되겠군. 그럴 수는 없소." 하면서 그 땅을 도로 사서 갖지 않겠다고 하였다. "내가 사서 가질 것이지만, 당신이나 사서 가지시구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소."

 

손해 볼 것이기에 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일이 선이고 옳은 일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손해 본다는 것입니다. 

 

7, 8절입니다.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기업 무를 자는 신을 벗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이유는 손해를 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신을 벗는 행위는 신명기 25장 5-10절에서 등장합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그 내용을 보면 죽은 형제가 아들이 없을 때에 형제의 아내에게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행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를 거부한 사람은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이며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발적으로 신을 벗습니다. 

어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손해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이기에 보아스의 행동이 더욱 돋보입니다. 

9, 10절입니다.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은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보아스는 이때다 싶어 바로 룻은 아내로 맞이하고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울 것을 말합니다.

보아스에게도 당연히 손해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기회를 잡은 듯 재빨리 증인을 세우고 선포합니다. 

11, 12절은 보아스의 말에 자신들이 증인이며 보아스를 향해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납니다. 

 

보아스의 모습은 참 대단합니다. 

그의 인애는 정말 놀랍습니다. 

여기서 인애를 다시 기억해 볼까요? 

 

약한 자가 곤궁에 처해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자발적인 충성과 헌신, 사랑’

 

보아스는 제대로 인애를 보여줍니다. 

룻에게 한 약속을 지킵니다. 

자신이 첫 번째 기업무를 자가 아님에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손해를 보는 것이 명확함에도 충성을 보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오지랖'입니다. 

물론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고, 짜증 나게 하는 오지랖이 아니라 좋은 오지랖입니다. 

주제넘게 아무 일에나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을 오지랖이라고 하는데 보아스는 주제를 지키며 좋은 참견을 합니다. 

 

우리가 보여야 할 적극적 선의 모습입니다. 

인애의 모습입니다.  

보아스의 모습은 인애를 보여주신 예수님,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기업 무를 자 또는 아무개로 표현되는 사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등장하는 기업 무를 사람을 보아스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이 이야기를 재밌게 이야기합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다행이지만 다른 사람의 기업을 잇지 않음으로 그 기업을 끊기게 되고 결국 이름을 남기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행동이 마치 자신의 이름이 끊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공감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기업 무를 자는 잘못이 없습니다.

지금 시대에서 보자면 그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롭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본인이 손해 볼 일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극적인 선을 베풀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정정합니다.  

아무개는 잘못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신앙생활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퇴보합니다. 

인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하나님의 인애를 받은 우리가 인애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기본만 하려고 합니다. 

어려서는 그렇다고 하지만 이제 성숙해야 할 때입니다. 

몰라서 그랬다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손해를 생각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적극적 선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인애를 보여주는 보아스와 아무개가 비교됩니다. 

 

나는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 '아무개'와 온전한 인애를 보여주며 예수님 족보에 들어가는 '보아스'

인애는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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