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맥추감사절 주일 설교] "팔복(3) 온유한 자" (마 5:1~12)

소리유리 2024. 7. 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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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첫주입니다.

2024년도 벌써 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말 그대로 하면 보리를 추수한 후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 대한 다른 이름은 많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름은 오순절입니다.

그리고 칠칠절,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날은 첫 수확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는 감사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 자체에 설교보다는 계속 해오는 팔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팔복을 살펴보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팔복 세 번째 시간입니다. 

팔복은 순서대로 복의 내용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앞의 복이 뒤의 복과 연관됩니다. 

한 번 복습해 볼까요?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나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의미합니다.

철저하게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상태를 아는 것!

나의 상태가 바로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것!

결국 그러한 자들이 바로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기에 그로 인해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  
자기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

애통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절실히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함을 깨닫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복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5절입니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사실 팔복은 우리의 상식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

이 단어와 그러한 사람들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힘듭니다.

 

세상 기준으로 말해서 뭔가 독해야 합니다.
요즘 착하기만 해서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뭔가 독하고 강한 것이 있어야 하죠. 


요즘 가장 답답한 사람 중의 하나가 착하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놀부와 흥부 이야기도 놀부가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흥부는 그냥 착하고 무능하고 아이만 많이 낳은 무책임한 가장으로 여깁니다. 

'가난, 애통, 온유'라는 단어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기보다는 싫어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온유'라는 말의 사전적인 정의는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

말은 쉬운 듯 하지만 정작 온유하다는 것을 표현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가장 온유해 보이나요? 

아니 온유해 보이는 사람을 찾기 힘들면 가장 온유하지 않은, 즉 온유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은 누군가요? 
온유와 가장 거리가 뭔 사람?

우리는 뭔가 좀 난폭해 보이거나 잔인해 보이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온유에 대한 성경적인 주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

 

이에 대해 칼빈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이해가 가시는지요? 

온유라는 말이 이해되시나요?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에 대한 복도 우리가 반드시 누려야 할 복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은 하나하나 계속적으로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죠. 

그리고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이어지는 것이 바로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개의 복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겪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것일 것입니다. 
온유는 이 두 가지를 겪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면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하여서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함을 느껴 하나님께 애통하는 자라면 반드시 누리는 온유한 자란 무엇일까요? 

사실 온유가 표현될 때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말씀드려 볼까요? 

심령이 가난한 것 그것은 혼자서 해도 됩니다.

애통하는 것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하나님께 애통하면 됩니다. 

 

온유하다는 것 그것은 혼자서 '나 온유해!'라고 외쳐도 소용없습니다.

아니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지고 나서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 온유해졌구나'하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그리고 애통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그리고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온유하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판단이 아닌 나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의 판단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한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온유한 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선천적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온유는 성령님을 통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저 착해 보이고 따뜻해 보이는 것을 온유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으로 그냥 참으로 훌륭하다는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

자신의 상태를 알기에 그리고 하나님께 애통한 자이기에 교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니 교만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더 이상 방어하지 않습니다.

방어할 만한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일단락 짓고 다른 어떤 권리나 공적도 갖고 있지 못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이 조금 어렵죠. 
여기에 있는 많은 이들이 온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수련회 때, 기도회 때를 함께 생각해 보죠.

하나님께 자신의 무능력함을 아뢰고 하나님께 애통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 교만함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다른 이들에 대한 적대감도 없습니다. 
그때의 다른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아무리 과격하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애통하고 난 후의 그 모습 속에 자신의 것은 없고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순간 단편적인 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온유함을 늘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나의 모습을 온유한 모습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쉽습니다.

혼자서 잘 해내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발생합니다. 
온유하다는 것!

그것은 혼자서 아무리 온유하다고 외쳐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제부터는 혼자가 아닌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복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땅'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옵니다.

그것은 유대 땅, 이스라엘 땅, 어느 지역, 하늘과 땅(천지),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 지면, 흙, 육지, 온 세상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유사한 구절이 시편 37편 11절에서 나옵니다.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땅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에 대한 신학이 연구될 만큼 땅은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대한 즉 가나안에 대한 중요성을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시편과 연관시켜 이스라엘 땅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아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철저하게 애통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성품을 끝까지 유지해야합니다.  

 

그러한 자들 즉 그러한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그들에게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 그것은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녀이기 때문에 상속자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자녀이기에 가난과 애통과 이제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가 돼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온유.
다른 이들에게 나의 모습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습니까?
온유한 자로 보이고 있습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을 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

그것은 담을 쌓고 혼자서만 아무리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가? 

늘 그것에 민감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 비유로 말씀드렸던 수련회 때의 기도회 때의 우리들의 모습.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마음들.

그때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득하다면...

아니 우리의 삶 가운데, 나의 삶 가운데 늘 유지된다면...

그리고 그것은 일부로 억지로 보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처음의 온유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계속해서 온유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변의 사람들로 인해 내가 화가 나고 내가 그들보다 더 잘났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할 때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였음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이나 성장한 모습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계속 기억하며 내가 어떠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기억하며 온유한 모습을 유지해가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말씀드렸듯이 혼자서 골방에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온유한 모습은 그냥 바로 드러납니다. 

마치 정말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체험했는가? 

정말로 하나님께 애통했는가? 
그게 진짜인가? 

그것이 진짜였다면 온유한 모습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아니라면 아직 멀었습니다. 

철저한 가난함과 애통함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늘의 복을 누리십시오. 

땅을 기업으로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속성을 보여주십시오. 

 

저 사람은 참 온유한 사람이야!  
특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그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아니 모든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온유함을 잘 유지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맥추감사절!

지금까지 살펴본 복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들을 찾아보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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