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 설교] "팔복(2) 애통하는 자" (마 5:1~12)

소리유리 2024. 6. 2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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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로 지난주일부터 팔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복! 기억나시나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잠시 복습을 해 볼까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가난의 의미가 아닙니다.

심령이라는 말이 덧붙여져서 나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의미합니다.

철저하게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예를 말씀드렸죠.

하나님을 모르고 죄에 가득한 자는 뿌리 뽑힌 나무와 같다고 말입니다.

죽은 자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은 것이죠. 
자신의 그 상태를 아는 것!

나의 상태가 바로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복된 것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복과 아주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오복이나 혹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이야기할 때의 그 복과는 천지차이입니다.

하지만 팔복이야말로 정말 참된 복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팔복은 내가 그중에 몇 가지 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복을 누려야만 합니다.

또한 팔복은 선천적인 복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누려야 하며, 노력하고 고심, 고민하고 이루어야 할 복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복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를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슬퍼하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70인역에서는 '애통하는 자'를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많이 슬프고,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더 많이 흘려야 복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자들이 얻는 복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서로 복 많이 받으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새해에 더 슬프고,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나는 일들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말하기 민망합니다. 

팔복의 두 번째 복을 받는 자가 되기 위해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납니다. 

 

하지만 이 복은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팔복은 연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와 연속성을 가지고 이해해야 합니다. 

즉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따라오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정결하심 앞에서 나의 철저한 무능과 절망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나를 애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애통한다는 것은 그냥 슬피 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악 된 모습,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함을 바라볼 때 그 결과로 인한 아픔이 사무쳐오는 것입니다.

즉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대면하고, 검토할 때 자기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집회, 기도회 때 많이 볼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애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죄악 된 것들을 생각하며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 것임을 잘 알기에 그는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애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누가 많이 감격할까요?

누가 더 많이 감격하고 그 사랑을 더 많이 느끼고 깨닫게 될까요? 
그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 정말로 하나님이 없으면 절대로 못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내가 정말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정말 느끼고 있습니까?  

그리고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가난함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의 가난함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함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합니다.

그저 애통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심령의 가난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또한 깨닫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오는 감정이 바로 '절망'입니다. 

 

그 절망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내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을 때에,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써도 어쩔 수 없을 때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그저 슬프고, 울고, 가슴 아프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기에 그로 인해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

그러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복과 많이 다르죠.

애통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절실히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함을 깨닫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애통한다는 것!  
그것으로 인한 복이 있다고 성경에서는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를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곁에 불러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죠.

내가 어쩔줄 몰라 나 스스로도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애통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이고 복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기를 원하지만 애통하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전적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그 가난함으로 인해 당연히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애통함 속에 하나님께서 나의 곁으로 오실 것입니다. 

한 폭의 그림을 상상해 볼까요?
한 아이가 자신의 비싼 그릇을 깨버립니다.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있다가 조각들을 모읍니다. 

접착제로 붙여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수단 방법을 동원해 봅니다. 

하지만 변함은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는 다가오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기껏 모아둔 조각마저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저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 아이에게 돌아온 부모님이 옆에 슬그머니 앉아서 그 아이를 안아줍니다. 
그 아이가 부모에게 받은 그 따뜻한 사랑은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아이에게 어떠한 복보다도 더 큰 복인 것입니다. 

애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애통할 것이 나는 없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나의 철저한 무능력함으로 인해 애통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나에게 큰 복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경에서 나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유명하죠.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무능력함을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밧세바와의 범죄 후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철저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고백이 시편 51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그 위로가 너무나 큰 복입니다. 
하나님께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시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에 대한 참된 애통이 있는 자가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곁으로 불러 함께 해주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또한 그에 따르는 복도 당연히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합니다. 

나의 심령의 가난함을 알고, 알기에 애통하는 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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