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주일 설교] "팔복(1)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1~12)

소리유리 2024. 6. 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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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산상설교 중에 팔복을 설교합니다. 

팔복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찬양곡으로 여러 편 만들어지기도 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유명함은 '복'에 관심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을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오복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복자는 일왈수요 이왈부이요 삼왈강녕이요 사왈유호덕이요 오왈고종명이라”

 

풀어쓰면 '오복이라는 것은 첫째 수명, 둘째 부유함, 셋째 편안함, 넷째 훌륭한 덕을 닦음, 다섯째 제 명(命)에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오복 중에 지금 누리고 있고, 누리고 싶은 복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고등학교 때 손금, 반지점, 별자리, 혈액형을 보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를 함께 다니는 친구가 그런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의 반지점을 보더니 스물네 살 정도에 일찍 결혼한다고 하더군요.

물론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손금을 보더니 오복 중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그 당시나 지금도 전혀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 기분은 별로 좋지 않더군요.

그래도 친군데 오복 중에 몇 가지는 있다고 해주지 하나도 없다고 하다니...

아무튼 모든 사람들이 복을 좋아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한 해의 첫인사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복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의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정의를 달리 말해보면 '행운과 행복을 삶에서 누리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행운과 행복을 삶에서 누리기 위해 원하는 복'이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복을 누려야 할까요? 

팔복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복,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복을 살펴보지만 미리 팔복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의 복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것, 위로를 받는 것,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 배부른 것,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을 보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 것, 하늘의 상이 큰 것"

 

또한 이 복을 받는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기본적인 구조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언급하고 그 사람이 받을 복을 이야기해 줍니다. 

즉 '사람'과 '복'을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복을 받기 위해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

 

팔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오복은 내가 그중에 어떤 복이 있는지 찾습니다. 

하지만 팔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복을 다 누려야 합니다. 

원하는 복이 아니라 모든 복을 받아야 당연한 것이 팔복입니다. 
즉 팔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복입니다.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팔복을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팔복을 설교하면서 계속 본문은 동일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팔복 중에 처음 등장하는 복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복으로 모든 복의 시작이 되는 복입니다. 

모든 그리스도들이 반드시 누려야 할 첫 번째 복!

그 복이 있는 사람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의미가 우멋일까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 복과 가난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싫어합니다.

가난이란 말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고 쪼들림.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 가난하다는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옆사람에게 가난하길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욕입니다.

내년에도 올해보다 더 가난하길 소망합니다. 기대합니다. 열심히 가난해지기 기도하겠습니다.

이건 저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복을 누리기 위해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난함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결여!

말이 좀 딱딱한가요?

 

한 마디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고 작은 나라는 사실!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봐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많은 성경의 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낮은 모습을 보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 이로서 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극악한 죄인인지를 고백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뛰어난 성경 속의 인물들입니다. 

아주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뛰어난 능력과 지식과 힘과 통솔력도 가진 리더급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낮아집니다. 

아니 자연스럽게 낮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가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저 죽은 몸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냥 너무 겸손해서 혹은 있어도 없는 척이 아닙니다.

정말 없기 때문에, 정말 가난하기 때문에,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너무 부끄러워합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볼 때 너무나 형편없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하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내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 죄인인 내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최대한 시선을 내게 두지 않으려 합니다.  

죄 때문에 밤새도록 흐느껴 우신 적이 있으신가요? 

도저히 이런 자신의 모습이 안타깝고 어쩔 줄 몰라 답답해 하나님께 매달리신 적이 있으십니까? 

김세윤 목사님은 죄인을 뿌리 뽑힌 나무로 비유를 합니다.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죽은 나무입니다. 

뿌리가 뽑혀 죽어간다는 것도 모르고 '난 아직 괜찮아'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가난, 갈급함이 점점 사라져 갑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도 큰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서 나의 무력함, 나의 무지함, 나의 죄악을 깨닫는 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이라는 것은 나의 영적 무능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보니까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안타깝고,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내 손을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심령의 가난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자존심?

그런 것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면 다행입니다. 

 

동정? 

그거라도 주면 다행입니다.

자존심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손을 내밀면서 도와달라는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공급받습니다. 

죄로 인해 그 공급이 끊어졌을 때에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더 실감하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됩니다. 

아니 우리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가 됩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구한테 기대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하는 심령의 가난함.

매번 반복되는 죄악 된 생활 속에서 찾은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갈급함!

그것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심령의 가난함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것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지 않은 척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제는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무뎌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세상의 모든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다만 그 가난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나의 상태를 깨달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깨닫는 자가 누리는 복이 천국이라는 복입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해야 갈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함을 느끼는 자가 하나님을 찾게 되고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들과 같아지지 말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그것이 결국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게 합니다. 


이 말이 축복의 말이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

나의 심령이 얼마나 가난한 가를 절실하게 느끼는 자가 되십시오. 
가난해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심령이 가난함으로 천국을 소유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내가 반드시 누려야 할 첫 번째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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