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며 묵상하고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합니다.
사람에 따라 금식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엔 더 특별한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습니다.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부활절 계란과 칸타타가 전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부활절 점심 메뉴에 떡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특별한 어떤 행사를 추가해야 할까요?
전도행사, 부활절 계란 꾸미고 나누는 행사, 이웃 돕기 행사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이라는 교회 절기를 잘 보냈다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절기를 지키는 의미와 그 의미를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를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말한 비중이 크지 않다는 것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보내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종려주일을 '진짜, 제대로, 잘' 보냈으면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11절입니다.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내용입니다.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제목을 ‘왕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명하기도 합니다.
1, 2절을 보겠습니다.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명하십니다.
이 내용은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4, 5절입니다.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선지자는 스가랴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마태복음 21장 5절은 스가랴 9장 9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7~9절입니다.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리의 대다수가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 주위의 많은 이들이 소리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북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무리가 하는 행동입니다.
즉 예수님의 입성은 왕으로서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소동하다'라는 말은 지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난리가 났습니다.
웅성웅성거릴 정도가 아니라 흔들릴 정도로 온 성이 시끌벅적합니다.
2002년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4강에 올라갔을 때를 상상하면 비슷할 것입니다.
소동이 난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백성들이 흥분한 것입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왕을 모시는 것은 그들이 그동안 기대하던 왕이 드디어 입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구약 말씀에 근거하여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더 크게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모습을 잠시 냉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왕의 입성으로 대단한 환영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동이 날 정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다른 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평소에 있으시던 수수한 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타는 나귀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황제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의 모습에 비하면 초라해 보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맞이하는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입성 때에는 어땠을까요?
무리들은 준비된 자들이 아닙니다.
그냥 오합지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성과 축하의 표시는 고작 낡은 옷과 나무 가지입니다.
한 신학자는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는 나귀, 시골사람 그리고 환성을 지르는 오합지졸들을 경멸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왕다운 옷을 입지 않으셨고 그를 환영하는 무리를 보아하니 별로 문제 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무리들이 소동을 일으키며 예수님을 환영하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왕으로 등극하시기 위해서 백성들을 선동하며 입성하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그리고 지금은 인간으로 초라한 입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을 찾아보겠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자기를 낮추시어 인간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치스러운 일들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창피하고 얼굴이 붉어질 일들이 있습니다.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도 예수님이 당하신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부터 그랬고 지금 영광스러워 보이는 예루살렘의 입성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셨고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입니다.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분은 다 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지 않으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에...
그분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입성은 결국 나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고통의 입성이셨습니다.
또한 복종의 입성이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영광의 입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입성에 대해서 무리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했을까요?
환호성을 지르며 옷을 깔고 나무 가지를 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칩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해방과 구원을 의미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메시아가 공식적으로 입성하셔서 진정한 왕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은 당장 그들을 압제하던 로마의 손아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떵떵거리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메시아를 통해 당장 현실적으로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쫓아다닌 것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한 자리 하나씩 차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낮아지심으로 초라한 환영을 받으며 마음에는 앞으로 당할 십자가의 잔을 생각하며 입성하십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그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여기기보다는 출세의 기회로 잡고, 지금보다 나아질 현재 형편에 관심을 둡니다.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지만 무리들은, 우리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성이 나에게 어떠한 도움이 될까?'입니다.
전혀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종려주일,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는 바라보아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그 고통과 십자가가 바로 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내 마음에 입성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내가 당해야 할 것임을 절실하게 느끼며 죄에 대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사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의 절정은 바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라는 것!
예수님께서 입성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
할 수만 있거든 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고통의 기도를 드리시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는 그 기도가 바로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드려졌다는 사실!
이 주간에 그 사실을 느껴야 합니다.
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입성하시는데 나는 그분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종려주일 이후로 고난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에 환호성을 지르고 환영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은 바로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해방되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대가 깨져버렸을 때에 그들은 같은 입술로 같은 목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이중적인 그들의 모습...
그리고 고난주간을 보내는 나의 모습...
똑같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예수님.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예수님이 나의 마음에 입성하시는 한 주가 되길 기도합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던 그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나를 생각해 보는 한 주가 되길 소망합니다.
더 이상 '종려나무'를 '십자가나무'로 바꾸어 버리는 내가 되지 않길 간절히 기도하는 한 주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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