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사도신경(4) -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요 1:1~3)

소리유리 2024. 8. 2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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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수요일입니다.

비가 와서 시원하기보다는 습도가 높아져 불쾌지수가 높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배려심이 필요한 날씨가 아닌가 싶습니다. 

 

수요일마다 사도신경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주에 사도신경 즉 신앙고백에 대한 이야기, 두 번째 주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세 번째 주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예수님에 대한 자세한 고백이 들어갑니다. 

오늘 살펴볼 사도신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그리고 같이 살펴볼 본문은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성과 합리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시대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늘 고백합니다. 

놀라운 이 고백이 담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처음 나옵니다.

원시복음이라고 말하는 성경구절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한 예언이죠.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을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이렇게 언급된 여자의 후손 이야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시기 위한 엄청난 계획!

그 계획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는 대작 영화를 보면 굉장히 놀라워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서 주인공은 2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숟가락으로 굴을 파서 탈출합니다. 
장장 20년!

대단하죠. 정말 입이 쫘악 벌어질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다들 잘 아시겠죠.

그 영화는 10년의 제작기간과 10만 명의 출연 인원.

1년여 촬영기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을 필름을 소비했다고 합니다. 

 

대사 한 마디 이상하는 인물만 496명, 하이라이트인 15분간의 전차 경주신을 위해 1만 5천 명이 4개월간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에서 무려 11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엄청나죠. 

'정말 대단하다! 앞으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거야!'라고 감탄합니다. 

벤허나 십계라는 영화를 보면 장면 장면이 대작일 뿐만 아니라 스케일이 엄청 크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것!

대작 영화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시작인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시작되어 마태복음에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아담 그리고 가인과 아벨!

가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여기에 있다'입니다.

사람들이 추측하기론 하와는 가인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그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아담과 하와, 죄를 범한 그들에게 아들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형이 동생을 죽입니다.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그가 여기에 있다고 이름을 지은 부모들은 실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뱀의 후손의 머리를 부수어야 하는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 셋을 보내주십니다. 

 

셋의 계보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결국 또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온 땅에 사람들이 악한 생각만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선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시죠. 

 

다시 잘 되는 것 같지만 다시 바벨탑이라는 거대한 죄를 인간은 범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아브라함이 선택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시작은 그리 믿음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답게 만드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는 의식을 합니다. 

 

언약을 '베리트'라고 합니다.

피로 맺어진 언약이죠.

쪼갠 고기 사이로 언약을 맺을 당사자인 둘이 지나갑니다.

이 언약을 깨면 쪼개진 고기처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쪼갠 고기 사이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지나가십니다.

구원의 모든 짐을 하나님 스스로 지신다는 것이죠.

그만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 기다리던 이삭이 마침내 태어납니다. 

자녀가 없어서 고민한 '아브라함과 사라'지만 사실 자녀가 없다면 가장 곤란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언약을 잘 알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야곱, 요셉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유다로 갑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을 보면 더욱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후에 아합이나 다른 악한 왕들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성경을 보면서, 믿음의 영웅을 바라보며 본받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구약은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기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도 연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국 동정녀로부터 예수님을 탄생시키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벤허라는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보다 훨씬 더 대단한,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대작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창세기부터 이야기되어 온 것이 드디어 실행되는 4천 년이 넘는 아니 태초부터 시작된 일이 드디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감동과 떨림, 환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살펴볼 것은 성육신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요? 사람이신가요? 

하나님이시면 십자가 고통도 별로 아프지 않았으시고 배도 안 고프시지 않나? 

사람이면 이적이나 기적을 보이실 수 없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먼저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부터 믿기 힘듭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필요성은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정녀 탄생,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예언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말도 되지 않습니다. 

최근 최근 생물학자들은 세포 하나를 잘 배양하면 암수의 결합 없이 생물체를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 예수님은 상관없습니다. 

 

혹은 오늘 본문의 처녀를 젊은 여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별로 특이한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을 징조로 한다는 것은 너무나 우습죠. 

 

"네가 앞으로 크게 될 것이다. 그 징조로 너는 밥을 먹고 잠도 잘 것이다. 사람도 만날 것이다'

 

이건 징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징조라는 것은 뭔가 특별한 것입니다.

마치 동정녀 탄생 같은 것처럼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동정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그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들은 결국 동정녀 수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인정해야 하는 것이죠.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과학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학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이해의 영역이 아닌 인정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사람이신가? 하는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쉽게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죠. 

지난주에 이어 교회사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주후 4세기 경에 아폴리나리스는 예수님은 몸과 영혼은 사람이지만 정신은 하나님이시다고 주장합니다. 

그 후에 네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은 신성과 인성은 서로 병립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시고 고통을 당하실 때는 인성 편이고 교훈이나 기적을 일으키실 때는 신성 편으로 통일성이 없는 완전한 사람도 하나님도 아닌 그 둘이 같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의 주장에 대해서 클리루스라는 사람은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데 신성이 인성보다 더 우위에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성이 신성 속에 흡수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둘 다 이단으로 정죄받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유티케스’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예수님은 보기에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합니다. 

아주 복잡하죠. 

이러한 가운데 451년에 칼케돈에서 회의가 열립니다.

그리고 칼케돈 신경이 나옵니다. 

그 내용에서 필요한 부분만 알려드리겠습니다. 

“거룩한 교부를 따라, 우리는 일치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의 동일한 아들이며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여 참 신이며,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진 참 인간이다. 

신성으로는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본질이 동일하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되, 죄는 없으시다'. 

신성으로는 창세 전에 성부로부터 출생하였고,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와 우리 구원을 위하여 신의 수태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독생자의 양성이 혼합, 변질, 구분,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양성의 구별이 연합으로 제거되지 않고, 각 성의 속성들이 한 인격과 한 실재 안에서 보존되고 협력한다. 

두 인격으로 분리되거나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동일한 성자, 독생자, 참 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일찍이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증거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고, 우리에게 전수된 교부들의 신앙고백도 그러하다.”

말이 어렵죠. 

중요한 것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칼케돈 신경은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지 우리에게 무엇을 이해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것 그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부분 때문에 골치를 썩지 마십시오.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혼돈하고 흑암이 가득해집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 이것이 결정되고 그렇게 믿고 1,600년을 흘러왔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즉 계시로 알려주신 것만 겨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그냥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하며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것을 고백하며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필요하셔서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몇 천년에 걸친 계획 가운데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가 아닌 우리의 믿음, 신앙고백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것에 짜증 낼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위대함을, 경이로움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에 대한 고백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계속 이어집니다.

사도신경을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하며 다음 주 수요일에 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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