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2 - 지씨"

 

오늘따라 '천'씨의 기분이 좋지 않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네.. 네..'를 연발하지만 얼굴 표정은 아주 안 좋다. 

가끔 천씨를 추종하지 못하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 

종종 일어나는 경우다. 

 

큰 문제가 아니다.

천씨가 '네네'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의견은 무시된다. 

금방 잊고 천씨가 하고 싶은데로 한다.  

그보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요즘 수시로 짜증내며 기분이 좋지 않은 심각한 이유가 있다. 

 

천씨의 표정을 살펴보는 '지'씨는 억지웃음을 보여준다.  

천씨는 지씨를 보며 귀찮은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창가 쪽으로 간 지씨는 천씨 뒤에서 입을 삐쭉거린다.

종종 있는 일이라 익숙하다. 

 

통화가 끝났다.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천씨의 짜증은 아침에 시작되면 하루 종일 간다. 

하지만 지금 방법이 없다. 

지씨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천씨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드라마 때문이다. 

지금 보는 드라마가 곧 끝난다. 

그리고 더 이상 볼 드라마가 없다. 

 

다른 드라마? 

웬만한 드라마는 벌써 여러 번 봐서 대사를 외울 정도가 되었다. 

지금 보는 것도 5번째다.  

요즘 사업도 잘 안 되고 드라마 보는 것이 가장 큰 낙이다.

 

천씨는 드라마광이다.
하루에 보통 10편 이상은 본다.
일할 때 계속 켜놓고 잠시 쉴 때는 본격적으로 본다.
집에서는 밤새 본다.

지씨는 오늘따라 '팽'씨가 원망스럽다.
팽씨는 천씨가 보는 드라마 공급책이다.

천씨가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으면 바로바로 공급했었는데... 

 

팽씨가 없어 요즘 드라마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물론 다른 사람이 공급해 주지만 이전 같지 않다.  

천씨가 요즘 짜증을 잘 내는 이유다.   

 

지씨는 지금까지 눈치 하나로 버텨왔다.

특별히 뛰어난 능력은 없다. 

탁월한 상황파악 능력으로 항상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짧고 굵게 가는 것보다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지씨의 목표다. 

그래서 재주, 기술을 배우기 보다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는 것을 배웠다. 

 

오늘 같은 날은 천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다주며 천씨가 싫어하는 사람 욕을 같이하면 된다.  

지씨의 가장 뛰어난 재주! 

그건 '맞장구' 재주다. 

뒤에선 입을 삐쭉거리지만 앞에선 가장 크게 맞장구를 친다.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천씨와 오랜 기간 지내면서 익힌 비장의 기술이다. 

 

하나 더 놀라운 재주가 있다. 

'떠넘기기' 재주다.

본인의 실수, 잘못을 다른 이의 잘못으로 만든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은 뛰어난 그 재주 덕분이다.  

 

그리고 재주라 할 수 없지만 오랜 기간 공들인 것이 있다. 

일상에서 천씨가 자신을 의존하게 만들었다. 

천씨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씨가 챙겨준다. 

 

사소한 것이지만 어느 순간 지씨를 의지하는 천씨가 됐다. 

작은 일들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일상생활의 큰 부분이 되었다. 

가장 큰 무기를 손에 쥐었다. 

 

맞장구, 떠넘기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천씨의 약점을 잡았다. 

지씨가 없으면 천씨가 불편하게 만들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  

 

지씨는 더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더 가늘고 길게 가는 방법을...

거의 완성단계다. 

'앞으로 두고 보자'라고 지씨는 벼르고 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굳이 천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오늘도 입을 여러번 삐쭉거렸지만 이렇게 하면서 살아남은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본다.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이긴 거다. 

 

지씨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오늘도 가늘고 긴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