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 설교] "하나님 앞에서" (행 4:1~22)

소리유리 2026. 6. 24. 13:57

 

 

오늘 수요설교읽기 본문은 사도행전 4장 1~22절입니다.    

사도행전 4장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오늘 본문은 1월 11일 주일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당시 설교문을 조금 정리해서 올려드립니다. 주일 설교문이라 조금 깁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주제는 내 믿음을 보이리라입니다.

야고보서 2장 18절 말씀을 주제 성구로 삼아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여야 함'을 올해의 주제로 정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들어온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

 

그런데 사실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올해 주제인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 느끼는 것, 깨달은 것을 실제 행함으로 옮기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말씀을 읽고 깨닫습니다.
결심도 하고 결단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상황에 부딪히면 주저하게 되고, 결국 실행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실제로 성경을 펼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결심하고, 묵상 노트에 적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민망하기도 합니다.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내 결심과 결단을 알립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금방 꺾입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수련회 때마다 결심하고, 결단하고, 약속합니다.
서로 기도 제목도 나눕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결심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올해 주제는 어렵습니다. 말은 쉽지만, 그 말이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이 고민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결심과 의지를 말했지만, 정작 행함에 있어서는 금방 꺾여 버렸던 사람입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를 예수님의 수제자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합니다.

 

그의 대표적인 활약 중 하나가 사도행전 2장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제자가 되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사도행전 3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나이가 약 40세 정도 되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주 멋진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 유명해서 찬양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36절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런 일에는 굉장히 민감합니다.
기적, 이적,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면 금세 사람들이 모입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서서 걷고 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다리를 처음 사용하는데, 단순히 걷는 정도가 아니라 뛰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병이 있다가 나은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 선천적인 장애가 고쳐진 것입니다.

아니, 고쳐진 정도가 아니라 건강한 다리가 새롭게 생긴 것과 같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학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더욱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걷는다는 표현을 여러 번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그만큼 이 사건이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혔지만,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44절을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1절부터 보겠습니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유대 사회의 유력한 사람들의 눈 밖에 나게 됩니다.

여기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입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 대제사장의 문중까지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당시 유대 사회의 유력한 인물들이 다 모인 것입니다.
권세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부유한 귀족 지배 계층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비위를 맞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전문가라고 자칭했지만, 천사와 마귀와 귀신을 부인했고,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은 그들에게 큰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법과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 서열로 보면 대제사장 다음가는 위치로, 성전 치안을 담당하는 우두머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전 수비대의 대장과 같은 인물입니다.

 

또 관리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하는 70인 의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킵니다.
장로들은 아마도 씨족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의 사본을 베껴 쓰고, 보존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튼 당시 유대 사회의 유력한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며 재판을 시작합니다.

바로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이 공회는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 법정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최고 법정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너무나 당당합니다.

먼저 사도들에게 묻는 질문이 7절에 나옵니다.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 대답합니다. 대답 내용이 8~12절입니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참으로 놀라운 답변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베드로의 이미지는 갈릴리 시골에서 배를 타던 어부였습니다.
정식으로 랍비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유창하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사실 유력한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징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최고 법정에 모인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합니다.

413, 14절입니다.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여기서 “학문 없는 범인”이라는 말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식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랍비 신학에 대한 정식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놀랐습니다. 게다가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눈앞에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난감해진 것입니다.

최고 법정에 모인 사람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론을 내립니다.

그 내용이 15~18절입니다.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기적이 눈앞에 나타났고,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우리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일이 더 퍼지지 못하게 막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17절에 “위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경고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런 뜻입니다.

 

“까불면 가만두지 않겠다.”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좋게 말할 때 그만해라.”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위협의 무게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법정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법정에서 판사가 하는 말을 쉽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이것이 그들이 고민 끝에 내린 최종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이 19절부터 21절에 나옵니다.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19절의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올해 주제인 내 믿음을 보이리라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행함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당시 최고 법정과 같은 곳에서, 유력한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봐!

너희 말 듣는게 맞니? 아니면 하나님 말씀 듣는게 맞니?

너희도 한 번 생각해봐라! 어떻게 맞냐?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고민해봐라!

 

이런 말입니다그렇게 말하고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너희들이 아무리 막아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열받을 만한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최고의 법원은 한 번 더 위협하고 놓아줍니다.

즉 까불면 죽어~ 그 정도입니다.

 

'좋게 이야기할 때 하지마!' 그리고 다시 놓아줍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의 위협은 역효과를 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베드로의 당당한 설교, 거침없는 말, 그리고 당시 권세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당황하게 만들고 책망하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정말 멋진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본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베드로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과 오늘 본문은 비교해 보기 참 좋습니다.

마태복음 2633~35절입니다.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굳이 다른 제자들까지 언급하며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 번 부인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또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모든 제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과 비교해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장소는 성전 바깥 뜰입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나 당당한 베드로가 등장하는 곳은 바로 산헤드린 공회 즉 그 당시 최고의 법원입니다.

부인한 베드로가 상대하는 사람은 비자, 어린 계집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상대하는 사람은 당시 아주 빵빵한 사람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관원, 성전 맡은 자 등등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때 베드로는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권세 있는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예수님을 전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를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먼저 정답을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베드로와 함께하신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더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베드로에게 실제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는가?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기에,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180도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었는가?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도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다시 고기 잡으러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믿은 이후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펴보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저는 그 부분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을 때, 그의 모습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성령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되면서 달라진 것은 바로 그의 기준이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달라졌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한 단어를 깊이 묵상했으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역자들이 좋아하는 말 가운데 코람데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혹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이 위험해질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기준이 "하나님 앞에서"*로 바뀐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준에서 생각한다는 것!

우리도 그와 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고,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곧 법정에서 유력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믿음을 보인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1397~10절입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편재하심, 혹은 편만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어디에나 충만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그러나 연습해야 합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 이미 구원 받았는데요?

맞습니다. 구원을 받았고, 받고 있고,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로 하나님 앞에서의 훈련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의 자녀로 믿음을 보이며 살아갈 때, 때로는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바다 위를 걷는 것처럼 두렵고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우리 모두가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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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 기도
1. 베드로 사도가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를 설명해 봅시다. 

 
2.  '하나님 앞에서'를 늘 인식하며 하루 하루 살아갑시다. 잊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도 생각해 봅시다.

이를 위해 묵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오늘 설교를 생각하며 찬양을 듣겠습니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입니다.   

 

 

https://youtu.be/TKSS0P4H2zQ?si=faH68p2rwPkNGnaY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
그 속에서 신실하게 날 지키시는 그 손길을 경험하는 것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바다 위로 걸어가는 것
내 온몸을 덮쳐오는 폭풍 속에서 잠잠히 주 바라보는 것

때론 불 가운데 휩싸일 때도 폭풍 가운데 무너질 때도
주님 내 곁에 함께 하시네 가장 가까이에 함께 하시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도 그들을 용납하는 것
나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 사랑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주께서 지신 십자가 기꺼이 지고 주와 함께 걸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