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 설교] "바른 신앙을 위한 질문들"(14) - 구속의 영역" (창 1:28)

소리유리 2025. 12. 24. 19:23
728x90
반응형

오늘은 12월 24일,  내일은 성탄절입니다. 

내일 오후 2시에 성탄감사예배가 있습니다.

성탄에 대한 설교는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도  "김세윤 박사에게 묻다 '바른 신앙을 위한 질문들'" 책 주제를 따라 설교합니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서 1장 16~17절입니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책의 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현실 정치 참여'에 대해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정치신학'을 통해 바라본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현실 참여를 평해 주시겠습니까?"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 논쟁은 항상 있었습니다. 

이에 따른 신학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해방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그리고 정치신학 등 수많은 말들이 무작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름을 붙인 신학이 등장할 때마다 논쟁은 이어졌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신학 종류에 대해 한마디 말한다면 '만들기 나름'입니다. 

꼭 규정되어 있는 것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모두가 알아야 할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성경신학, 조직신학' 정도면 충분합니다. 

여기에 좀 더 더하면 '실천신학, 역사신학' 정도면 전혀 모자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넘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눈치챈 분도 있으실 겁니다.

지금 말한 신학은 신학교에 가면 배우는 것들입니다. 

검증되고,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신학 교육으로 자리 잡은 신학들입니다. 

그 외는 어디서 뭐라고 하든지 '아.. 그래'하고 슬쩍 넘기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현실 참여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냐?'라고 물으실 겁니다. 

이에 대한 답은 '그것도 아닙니다!'입니다. 

사실 현실 참여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무의미하다는 말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하다는 말로 강하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논쟁할 필요 없이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는 당연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뭘 그런 것으로 논쟁을 해?'입니다. 

 

아마도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 '정치'와 연관된 여러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 상황에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약보다는 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기준 보다 하나님의 기준 아래 판단해야 합니다. 

여기서 질문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기독교인의 현실 정치 참여'에 대해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정치신학'을 통해 바라본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현실 참여를 평해 주시겠습니까?"

 

기독교인의 현실 정치 참여!

기준이 모호합니다. 

하지만 질문의 의도는 추측 가능합니다. 

극단적인 정치 참여 또는 교회나 목회자의 공식적인 적극 지지 등을 포함한 정치 사안을 표면으로 지나치게 드러내는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여러 논란으로 웬만하며 교회에서 정치는 금지어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현실 참여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미리 정치를 포함한 현실 참여는 필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한 명확하고 정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현실 참여를 독려하며,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전제로 살펴볼 것은 기독교인의 정치, 현실 참여에 대한 반대 의견입니다.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는 현실 참여, 무엇보다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가운데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통치와 섭리 가운데 '현실, 정치'가 제외되어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대답은 금방 나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이 땅의 여러 일들 그리고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아래 세상의 일, 정치는 제외되었는가? 

그리고 기독교인은 흔히 말하는 세상의 일, 정치에 무관심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의 답은 다들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세상의 모든 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통치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굳이 해방, 여성, 민중, 정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구분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옳은 방향입니다. 

기독교세계관은 크게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 가지 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우리는 6일간 창조된 것들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처럼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혹은 왕권들, 주권들, 통치자들, 권세들, 만물'이 다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창조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아무것도'에는 시간, 공간, 감정, 가정, 사회, 국가,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무에서 유로의 창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왕권, 주권, 통치자, 권세 등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간의 창조만을 기억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창조에 있어서 창조행위와 창조질서를 구분합니다. 

창조행위는 발생의 기원을 말한다면 창조질서는 발생된 것들 즉 존재의 방식과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조행위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창조질서로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방향으로 가정, 국가, 예술, 학문 등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이런 기독교세계관 아래서 창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고 훨씬 포괄적입니다.  

창조에 대한 기본 인식을 깨고 넓혀야 합니다. 

모든 것에 가시적인 것만 일회적인 창조만 생각하지 말고 창조된 것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질서를 꼭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타락은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창조된 모든 것'이 타락했습니다.

타락은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처럼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이 다 타락되었습니다. 

타락의 영향은 실제적으로 내가 속해 있는 가정, 학교, 사회, 국가, 경제, 사람관계 등 창조질서에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세계관의 세 번째 틀인 '구속'입니다. 

'창조, 타락'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속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속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광범위하고 훨씬 포괄적이다"

 

구속의 의미에 '회복'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독교세계관 아래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회복해야 할 대상이 '나' 개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조되었고 타락한 피조된 모든 것들이 그 대상입니다. 

 

피조된 모든 것!

즉 이 범위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가정,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는 필수적입니다. 

현실이라는 이름에 포함된 정치, 경제, 사회, 가정, 국가 모든 것을 구속시켜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타락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속된 우리들 즉 기독교인들이 타락된 모든 것들을 구속해야 합니다.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구속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과 감사는 그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영역을 어떻게 구속할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가정 그리고 사회, 국가, 직장 등 모든 영역에 이에 속합니다. 

우리는 '구속, 구원'을  넓은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구속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화목, 회복을 넘어서 창조계 삶 전체로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해합니다. 

교회와 세상, 믿음과 생활을 구분합니다. 

기독교인으로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교회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내가 일하는 영역 속에서 회복될 것들을 찾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현실 참여 또는 정치 참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준은 나의 취향, 나의 분노가 아니라 성경적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구속의 영역'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의 영역은 창조된 모든 영역 즉 타락한 모든 영역입니다. 

하나님 뜻에 비추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회복과 구속이 필요합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창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광범위하고 훨씬 포괄적이다.
타락은 창조계에 한 구석도 빠짐이 없이 철저히 영향을 끼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타락 혹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창조계 포괄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락의 철저한 성격과 구속의 우주적 범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적당히 타협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글 제미나이에서도 '구속의 영역'이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해 줍니다. 

 

"기독교에서 구속의 영역은 인간 개인의 구원을 넘어 공동체, 나아가 우주 만물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범위를 가집니다"

 

더 구체적으로 개인적 영역, 공동체적 영역(교회와 사회), 우주적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구속의 범위가 인간을 넘어 창조하신 온 우주에 미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온 우주에 현실 참여, 정치 참여만 빠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논리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 선언하지 않으시는 삶의 영역은 단 하 나도 없다."


구속은 단지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구속의 목표입니다.

그것에 정치와 사회, 경제, 가정, 국가 등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오늘 바울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구속을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정, 국가, 사회,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모든 영역에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관심을 갖고 구속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관심을 갖고 구속해야 할지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다만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거나 성경 기준으로 분명하지 않으면 추종해선 안 됩니다. 

또한 다양성과 다름을 구별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더 구체적인 사항은 앞으로 함께 풀어갈 숙제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적 기준 아래서 '창조, 타락, 구속'의 세계관 아래서 그 일을 감당하는 지혜로운 우리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주일 예배를 드린 후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삶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가 있는 모든 영역이 구속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나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삶의 예배자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

묵상 & 기도 (교재에 있는 적용과 기도를 이곳에 올립니다)

1.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 정치 참여 등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2. 삶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 오늘 주제와 관련된 노래를 감상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히즈윌  '예배를 드린 후'입니다.   

 

https://youtu.be/NJjv72hWAaE?si=n7O2Ib5bvxsM-Xzs

 

예배를 드린 후 삶으로 돌아가 삶으로 주님께 예배드리네
나의 삶은 주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한 예배였을까


예배를 드릴 때 만난 주님은 내 삶 속에 늘 함께 하시지
교회를 떠날 때 주님도 떠났던 나를 속이는 예배 이제 그만할래

 

아멘 했던 말씀은 삶으로 살아 보자 율법의 잣대보단 따뜻한 사랑을
높은 곳에 오르려는 발 돌이켜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나의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리 나의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리


이것이 내가 드릴 삶의 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