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찔"
며칠 전 그곳에 있는 한 분께 전화가 왔다.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분이다.
다른 일을 하느라 받지 못했다.
전화를 할까 고민한다.
그곳과 관계된 사람 또는 일에 아직도 움찔한다.
오늘에야 가장 평이한 인사말로 카톡을 보낸다.
답문이 온다.
언제 한 번 시간 될 때 교회 오신다는 내용이다.
오늘도 그곳에 있는 한 분께 전화가 온다.
이분도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 분이다.
역시 움찔한다.
전화를 받는다.
아내 친구가 하는 레드향이 어떻게 소문났는지 그곳의 연락처를 묻는다.
짧게 답변을 드리고 끊는다.
또 문자가 온다.
이상한 하루다.
택배 문자다.
뭐 주문한 것이 없는데 인쇄물이 도착한다는 문자다.
그곳에 배송되는 것 같다.
그곳에 있는 제자에게 아직 내 번호가 남아있는지 이런 게 왔다고 말한다.
그곳과 연관되지 않길 바라며 내 전화번호를 빼달라고 부탁한다.
어이없게도 이런 것에도 나는 '움찔'한다.
움찔...
'깜짝 놀라서 갑자기 몸을 세게 움츠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움찔한다.
여전히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전화, 카톡, 문자에 여전히 움찔하는 것이 우습지만 지금은 그렇다.
20년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강도로 세게 맞다 보니 지금은 '움찔'할 수밖에 없다.
그곳의 높은 사람(?)이 왜 그 사람과 내가 사이가 좋지 않냐고 누군가에게 물었다고 한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를 답변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유를 알면 찝찝할테니...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관심은 없다.
그래도 오늘 감사한 분들로 인한 택배 문자도 왔다.
이분들의 귀한 섬김에 감사하다.
선물에 앞선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생각하며 '움찔'거리는 마음과 생각, 느낌을 조금 수그러뜨려야겠다.
... 설명절 설교를 작성하고 설명절 가정예배순서지를 올렸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수년 내에' 부흥이 오길 기대해 본다.
아니 '수일 내에' 오면 더 좋겠지만...
더 이상 움찔거리지 말고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고백을 할 날을 기다려본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