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

"도피성"

소리유리 2024. 9. 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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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산책을 나간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걷기 좋은 날이다. 

 

 

... 그곳 또는 그 사람 소식은 전혀 모른다. 

그곳 사람들과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그곳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지 않는다. 

그곳이나 그 사람의 이름조차 떠올리기 싫은 탓도 있다.

 

며칠 전 친한 목사와 통화하다가 그곳 이름이 나왔다. 

기독신문에 그곳 광고 같은 것을 보고 내게 말해준다. 

별 관심 없다고 말한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지인은 이런 행태에 대해 그곳 욕(?)을 한다.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책도 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관심 없다. 

다만 책을 썼다는 그 자체가 놀랍고 어이없다. 

 

제목도, 무슨 내용의 책인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사람들이 읽기에 선하고 좋은 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한 이미지가 생긴다. 

내가 아는 그 사람과 전혀 다른 이미지... 

 

성경을 보면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민수기 35장 11절이다.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지중'이다. 

이와 반대되는 말도 등장한다. 

 

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부지중'의 반대는 '고의'다. 

실수로, 부지중에, 전혀 계획하지 않았을 때에 필요한 것이 '도피성'이다. 

하지만 고의로, 계획적으로 했을 때는 '도피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내가 당한 일에 있어서 가장 분노한 것은 '고의, 계획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의, 계획적'에 동참한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사과는 없다. 

'고의, 계획적'으로 불법을 한 것을 내게 당당하게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나 당당했다.  

 

도피성은 살인에 대한 내용이지만 내 경우엔 그것 못지않다. 

그리고 '고의'로 한 그들에게 도피성은 없다. 

들어가지 못한다. 

 

도피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가 책을 쓰고 신문에 광고를 했다. 

웃프다. 

무엇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럴까?

문득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창세기 4장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당당함!

도피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당당함이 너무 똑같다. 

아니 더 하다. 

책과 신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더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서글프다.  

아니 익숙함을 넘어서 당당한 그 모습을 보며 '우쭈쭈'(?)해 준다. 

지난번 썼듯이 '그래도 되니까' 계속, 더 심하게 한다.

슬프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도피성을 다시 생각해 본다. 

결국 도피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

이것이 진짜 현실이다. 

도피성 이야기가 오늘 왠지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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