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수요설교] "사도신경(3)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요 1:1~3)

소리유리 2024. 8. 1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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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로 사도신경을 연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입니다. 

첫 번째 시간은 사도신경 즉 신앙고백의 중요성, 두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 고백 그리고 세부적으로 교회, 부활, 영생과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그중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절반 이상이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에 대해 더 자세하고 길게 언급되는 것은 '자세하고 길게 언급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상으로 가장 많은 이단이 예수님과 관련하여 발생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오늘 나눌 내용이 많은 싸움과 다툼을 일으켰고 전 로마제국이 들썩일 정도로 말이 많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가요?

 

예수님에 대한 여러 고백을 하긴 하지만 개인적인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개인적인 고백, 주관적인 고백, 상대적인 고백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고백입니다.

이는 변할 수도 없고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고백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입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책망을 많이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에서는 태초부터 '말씀' 즉 '예수님'이 계셨고 그 '말씀' 즉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삼위일체라는 것이 어렵게 다가옵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단일한 신성에는 삼위가 계시니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누구로 말미암지 않았고 낳으신바 되지도 않았고 나오시지도 않으며, 성자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영원히 낳으신바 되셨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무슨 말인지 어렵습니다.

머리가 복잡하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부분도 아주 복잡한 부분입니다. 

사도신경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먼저 등장하는 것이 ‘그’입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말이 ‘외아들’입니다. 

 

외아들이라는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독자'입니다. 

'하나'를 의미하죠. 
즉 하나님의 독자라는 말이죠.

 

쉽게 우리는 '독생자'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1차원적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하나 밖에 낳지 않으셨나? 딸은 없을까?

예수님 쓸쓸하게 자라셨겠다.

아! 그러면 하나님 부인 즉 예수님 어머니는 누굴까? 

별의 별 생각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외아들에서 ‘외’라는 말은 하나라는 뜻이 보편적인 의미이지만 여기서 하나라는 숫자의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서 외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외'라는 말은 ‘독특하고 특별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의 아들이라는 뜻이죠.

이 외아들, 독생자라는 말로 신학적 논쟁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논쟁에 우리가 참여해서 연구하고 우리의 의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열심히 논쟁하는 것은 신학자들에게 넘기고 우리는 가장 건전하고 문제가 없는 의견을 따르면 됩니다. 

외아들은 독자, 몇 대 독자를 이야기할 때 그런 의미 즉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의 강조보다는 아버지와의 관계 즉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를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아들이라는 의미엔 '태어났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낳으신 아들입니다. 

하지만 낳았다고 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낳은 그런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탄생하셨는가? 
잠시 교회 역사를 공부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제일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은 '오리겐'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소위 어려운 말로 '유출설'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유출이라는 말은 통에 물을 부으면 가득차서 넘쳐흐르는 것처럼 넘쳐흐른다는 뜻입니다. 
오리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유출된 것이 예수님 그리고 우주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고 이 말씀은 하나님도, 피조물도 아닌 중간쯤 되는 하나님 즉 반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퍼지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당시 교부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와 황제 콘스탄틴 대제가 회의를 소집합니다. 

그는 '호모우시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본질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명확하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중에서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한 장로이며 유명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둘이거나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아니 그 말이 맞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어떻게 둘인데 하나인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으셨다고 생각하면... 이게 말이 되나? 

아리우스는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로 주장하고 '특별히 피조되었기에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까 어려운 단어인 '호모우시오스'를 '호모이우시오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라는 말이 하나 들어갔는데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호모이우스오스'는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본질이 비슷하다는 뜻이죠.

 

예수님과 하나님은 그 본질이 똑같지 않고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더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더’는 다른 주장을 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났고 당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주교인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당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잘 보여서 알렉산더는 파면시켜 버립니다. 

그 후에 아주 복잡한 교회사가 있습니다. 

서로 파면시키고 싸우고... 등등...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회의가 열립니다. 

그리고 그 회의 결과로 '니케아 신앙고백'이 탄생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역사, 이름은 굳이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만 이러한 고백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고백이 참으로 인간의 이해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백입니다. 

어려운 단어를 썼는데 유사본질이 아니라 '동일본질'로 결정됩니다.

인간적 논리로 생각해 보면 아리우스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지만 이 결정 이후 16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어떤가요? 

복잡한 말들을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의 범주에 넣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150명이 모인 회의에서 뛰어난 신학자들이 결정한 것은 결국 우리는 모르겠다를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시는데 그냥 인정할 뿐 왜 그런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가 정답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습관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든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아주 많습니다.

 

오늘 길게 이야기하는데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외아들 때문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부분은 그냥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단어는 우리를 빼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원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등장하고 우리 주입니다.

 
'예수'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뜻입니다.

'구원자'라는 뜻이죠.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리스도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을 찾아볼까요?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 적혀있습니다.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말합니다.

의미로는 '기름 부은 받은 자'입니다.

 

기름 부은 받은 자는 구약에서 '선지자, 대제사장, 왕'입니다.

예수님께서 삼중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가르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시고, 왕으로서 다스리시고 보호, 보존하십니다. 

 

무엇보다 '구원자'이십니다.

메시야!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주'가 등장합니다.

'주'라고 번역된 '큐리오스'는 사실 구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번역한 것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죠.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더 대단한 의미죠.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의미는 내가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시고 나의 주인임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사도신경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신앙고백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제 시작했습니다.

아는 것을 넘어서 믿고 있는가?

좀 더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잘 다져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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